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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잊히지 않기 위해 반복해 떠올린 질문의 형태 부서지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 기울이는 기나긴 마음…Wild Wisdom

기사입력2025-12-24 15:06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지난 몇 년간, 나는 장소와 사물에 달라붙은 사적인 기억이 공적으로 전환되는 조건을 탐구해 왔다. 기록되지 않거나 누락되어 흔적으로만 남아 버린 기억들. 그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왜 어떤 기억은 기록에 남을 수 있었는지, 왜 어떤 삶만이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지 궁금해졌다. 효율과 실용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역행하는 이 질문들이 내가 미술작업을 지속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작업하며 매우 세심하게 신경 써야지만 알 수 있는 작고 사적인 이야기와 멀리 있는 시선, 이 두 거리 사이 시공간을 왕복하며 바라보는 경험이 좋았다. 이를 ‘미시사와 거시사’라는 단어로 규정해 볼 때면 두 단어의 조합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허나, 글로 쓰면 근사했던 내 생각과 작업은 매번 예측한 대로 완결되지는 않았다. 매우 정확하고 우아한, 마치 정답과도 같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작업과 다르게 다소 썰렁한 작업이 나오곤 했다. 만드는 경험보다 보는 경험이 많이 쌓였던 시기. 손을 움직여 실험하기보다 글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더 익숙하던 시절. 그 시간을 지나며 돌파구가 필요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박선호, 야생의 입자(The Unattuned), 2025, 비디오 스틸 이미지.

대체로 나의 시간은 조각나 있었고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야지만 확보되었기에, 그 시간을 조금씩 붙여 나가며 작업에 쓸 시간 한 덩이를 모아 내 보았다. 타인이 시간과 마음을 써서 만든 것을 보는 일은 즐거웠지만, 내가 시간을 모아 만든 소중한 것들을 보는 일은 어쩐지 겸연쩍었다. 그럼에도 언젠가 이 작은 시도들이 쌓여 내가 질문이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전해질 거라는 믿음을 가져 보았다.

이러한 고민을 이어 오던 2023년 즈음부터 슈퍼 8 카메라를 작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카메라는 작은 필름에 빛과 먼지, 그리고 시간의 흔적을 남긴다. 혼자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크기와 무게, 필름 장전의 간편함은 전문적 장비가 아니어도 충분히 촬영할 수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줬다. 고민하는 시간은 길고,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으며, 현상과 스캔은 매우 값비싼 과정이었지만, 필름을 통해 찍는 감각은 비공식적이고 누락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매체와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다 주었다.

연초에 필름을 활용한 작업을 구상하며 개인전 기획안을 작성했다. 전시 제목이 작업의 첫 시작일 수도 있어 며칠간 심사숙고하며 고민만 했다. 그러던 중 한국어 제목을 ‘힘’이라는 단어로 떠올려 봤다. 매우 흔한 단어이지만, 단어가 가리키는 범위가 매우 추상적이고 넓어 마음을 담아내는 동시에 슬쩍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힘’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기획안을 더 구체화했을 때, 내가 드러내고자 하는 힘이 단지 물리적이거나 신체적 에너지로만 환원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슈퍼 8 영상이 머금는 먼지와 흠집, 시간과 얼룩은 내게 ‘힘’이란 개념이 더 느슨하고 미세한 결을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힘은 호명하지 않아도 남아 있는 미약한 흔적들, 크고 작은 것들이 밀려오는 물결 앞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다층적 감각이기도 했다. 이를 영어 제목으로 옮겨 낼 때, ‘Wild Wisdom’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거셈과 약함, 질서와 우발, 기록되지 않은 것들의 지혜가 겹쳐지는 상태. 이 ‘야생의 지혜’는 정확한 기억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인상들이 쌓아 올린 구조물에 가깝다.

개인전을 준비하며 나는 명확한 계획에 따라 완성되기보다 불완전한 가운데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는 작업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미흡함이나 약함이라기보다는 오래도록 정답을 찾으려 했던 태도로에서 벗어나,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더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나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힘(Wild Wisdom)’은 내가 견디며 지켜본 지극히 미시적인 순간들의 조합이자, 잊히지 않기 위해 반복해 떠올리는 질문의 형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완결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작업 과정이 매일 지속되고 작업이 내 삶을 바꾸는 과정을 더 가치 있다고 여겨보려고 한다.

계획과 실행 사이의 균열, 의도치 않은 흔적과 틈, 그리고 그 사이에 머무는 시간들. 그것은 말하고 싶지만 말하기 어려운 것들, 확정되지 않은 기억이나 아직 기록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아주 작은 것이 부서지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 기울이는 기나긴 마음일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