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법하지만, 실제 그런 형태로 존재한 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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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있을 법하지만, 실제 그런 형태로 존재한 적 없는 핍진성과 환영의 세계…론 뮤익

기사입력2025-11-23 10: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리얼리즘(realism)이 문제다. 여기에 ‘과잉’, ‘극도의’, ‘지나치게’를 뜻하는 ‘하이퍼(hyper)’가 접두어로 붙으면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호주 출신의 조각가 론 뮤익(Ron Mueck)에게는 늘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즉 ‘극사실주의’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의 핍진한 묘사력 때문일 것이다. 그의 조각 앞에서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 하이퍼리얼리즘을 붙이는 것일 게다. 그런데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 아닌가. 과잉된 현실 묘사가 과연 매일 마주하는 우리의 현실을 포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을 극도로 밀어붙이는 방식이 과연 우리가 느끼는 ‘현실’과 같은가.

그렇다면 론 뮤익의 조각은 사실적인가, 아니면 환영적인가? ‘걸리버 여행기’의 브롭딩낵 거인과 릴리퍼트 소인을 연상시키는 뮤익의 조각은, 크기에서부터 현실의 비례와 어긋난다. 이 첫 충돌에서 이미 우리의 현실과 틈이 생긴다. 이런 그의 조각에 ‘사실’이나 ‘현실’이라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덧붙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리얼하지 않은 리얼리즘

론 뮤익, ‘마스크 II’, 2002, 혼합 재료, 77×118×85cm, 개인소장. <출처=www.elle.co.kr>

리얼리즘은 본질적으로 모호한 개념이다. 통상 리얼리즘은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과 장면을 핍진하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있을 법한”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리얼리즘은 단지 현실 혹은 사실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사실처럼 보이도록 구성된 ‘사실 같은 허구’인 셈이다.

리얼리즘의 모호성은 한글 번역에서도 드러난다. 이 용어는 ‘사실주의’, ‘현실주의’, ‘실재론’ 등으로 번역되는데, 국내에서 이들 각각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먼저 ‘사실(事實)’과 ‘사실주의’의 ‘사실(寫實)’은 그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실제로 존재했던 일이나 현재에 발생하는 일’을 뜻하지만, 후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라는 의미다. ‘현실주의’는 actualism이라는 용어의 번역어와 겹쳐서 사용된다. 그리고 ‘실재론’은 의식이나 주관과는 독립된 객관적 실재에 관한 철학적 개념이다. 리얼리즘은 사실, 현실, 실재라는 이 모든 개념을 포괄한다. 이 때문에 리얼리즘의 의미는 모호하다. 그렇다면 여기에 ‘하이퍼’를 붙이면 어떻게 될까? 모호성은 배가 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이 론 뮤익의 조각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분류하지만, 정작 작가 본인은 이 용어가 자신의 작업에 붙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한 통념이 그의 의도와 어긋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미술용어사전’(월간미술 편저)은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을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지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고, “주관을 적극 배격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는 경향으로 정의한다. 이는 널리 통용되는 설명이다.

하지만 하이퍼리얼리즘은 다른 층위로 해석할 수 있다. ‘초현실적인 사실성’, 즉 실재를 넘어서는 사실성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재현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면, 역설적으로 대상의 실재는 퇴색되어 버리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파생실재(hyperréel, 하이퍼리얼)를 생성하는 시뮬라시옹을 통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시뮬라크르가 창출된다고 말했다. 하이퍼리얼리즘이 이러한 그의 시뮬라크르 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과잉된 현실 묘사는 끝내 현실의 자리를 ‘더 현실 같은 환영’에 내어준다. 이러한 의미라면, 론 뮤익의 조각은 하이퍼리얼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사실 같은 허구’이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환영’을 통해 보는 이의 지각을 교란하고 현실감의 경계를 시험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환영 사이

론 뮤익, ‘나뭇가지를 든 여인’, 2009, 170×183×120cm,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출처=www.yatzer.com>

그럼에도 여전히 론 뮤익의 조각에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주저된다. 그의 조각은 하이퍼리얼리즘을 뚫고 나가기 때문이다. 뮤익은 약 30년간 단 48점의 작품만을 제작했는데, 그중 실제 크기와 1:1 비례인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 그는 늘 실재보다 크거나 작게 스케일을 조정해 왔다. 이 스케일 변주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만들고, 현실과 환영 사이에서 감각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주목할 만한 작품은 ‘마스크 II’(2002)다. 작가의 자화상인 이 두상은 실제 인간 머리의 약 4배 크기로, 뒤편이 텅 비어 있다. ‘마스크’라는 제목과 비어 있는 뒤편은, 얼굴이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신체기관이지만, 결국 껍데기에 불과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할 지점은 얼굴만 존재하는 두상과 그 뒤편의 비어 있음이다. 주름, 솜털, 핏줄, 혈관까지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재현된 이 작품에 하이퍼리얼리즘을 붙이기 쉽다.

그런데 과연 껍데기 같은 얼굴만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이를 과연 ‘사실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조각은 얼굴만 잘려 있는 듯한 폭력적 상황과는 다르게 평온히 잠든 모습이다. 사방이 열린 공간에서 껍데기 같은 얼굴만 존재하는 이 두상은 세부 표현에서는 극사실적이지만, 전체 형상은 현실과 어긋난다.

‘마스크 II’와 비교할 수 있는 작품은 ‘어두운 장소’(2018)다. 이 작품은 얼굴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마스크 II’와 형식이 비슷하다. 하지만 개방된 장소가 아닌, 어두운 방 안에 설치되어 있어, 그 방이 마치 회화의 화면과 같은 역할을 한다. 게다가 얼굴만 존재함에도 어두워서 얼굴 외에 목과 어깨를 상상하게 하므로 ‘마스크 II’와 달리 ‘절단된 신체’라는 인상이 한층 옅어진다.

론 뮤익, ‘배에 탄 남자’, 2002, 혼합 재료, 77×118×85cm, 개인소장.

뮤익의 조각이 현실성과 환상성을 동시에 끌어낸다는 점은 그림 형제 풍의 작품 ‘나뭇가지를 든 여인’(2009)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나뭇가지를 품에 안고 뒤로 몸을 젖힌 채 서 있는, 작지만 단단한 체격의 여성은 어딘가 있을 법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작은 크기와 몸짓이 현실을 벗어나 동화나 민담에서 나올 법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유사한 인상은 ‘배에 탄 남자’(2002)에서도 감지된다. 긴 보트의 뱃머리에 나체의 남성이 앉아 있는 이 조각은 고전 회화 속에서 볼 법한 시적인 조형성을 지니고 있다. 즉 환상적인 조형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성의 몸은 살집이 있고 복부가 불룩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적인 중년 남성의 신체다. 이 두 작품의 인물은 지극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신체를 지니고 있으나, 그 조형성은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2016년 파리와 로마의 카타콤 지하 무덤을 본 뒤, 존재의 개별성 너머 집단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제작했다는 ‘매스’(2016~2017)는, 개별성을 식별할 수 없는 두개골들을 집단으로 배치한 작품이다. 가로세로 1미터, 높이 1.5미터의 거대하고 새하얀 두개골이 전시실에 쌓여 있는 광경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것이 곧 나의 머리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게 만든다.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개별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에 반해 이 작품은 무명의 집단적 죽음을 다룸으로써 역사적 참사와 재난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현실성과 환상성이 역사적 방향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론 뮤익은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형태로 존재한 적 없는 상황, 그럴듯하면서도 어딘가 불확실하고 때로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세계를 소환한다. 그 과정은 답답할 만큼 집요하게 이뤄진다. 그가 보여준 핍진성은 ‘사실’에 밀착되어 있지만, 그의 상상력은 사실을 뚫고 나온다. 결국 그의 조각은 ‘현실 같은 환영’인 것이다. 현실과 환영 사이 그 어딘가에 그의 조각은 놓여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