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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러시아, 유럽 잇는 ‘무빙 드로잉’ 꿈꾸다

움직이는 드로잉…전수천 작가 

기사입력2021-09-06 09:35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다른기사보기

2005, 광복 60주년을 맞은 해에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의 대륙을 관통하는 대형 드로잉이 펼쳐졌다. 흰 천으로 덮인 미국의 기차, 암트랙이 뉴욕에서 LA까지 달리며 열차가 붓이 되어 미 대륙에 궤적을 그리는 프로젝트다.

 

78일 동안 미국을 달렸던 한국을 상징하는 흰색의 천은 시간의 흔적과 자연의 흔적이 덧입혀졌다. 암트랙은 고속열차가 아닌 완행열차로 정차도 많이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자동차와 비행기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다소 이용객 수는 줄어들었지만, 철도를 따라 미 대륙을 횡단하며 그 풍경을 보고 또 직접 답사를 하기에 적합한 교통수단이다.

 

이 드로잉 프로젝트는 장대한 규모만큼이나 많은 준비과정이 있었다. 전수천 작가가 13년간 기획하고, 6년간 현실화를 위한 노력 끝에 성사될 수 있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흰 선=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이 호방한 드로잉은 당시 사람들에게 다양한 질문거리들을 만들어 냈다. 왜 미국이냐, 한국과는 무슨 관계인 건가 등의 질문이 쏟아졌고, 전수천은 이러한 질문을 모두 수용했다.

 

흰색에 대해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인종 문제에 대한 이슈를 떠올리기도 했다. 전수천이 흰색을 고집한 이유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수용하는 색상이기 때문이다. 이 흰색은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 그대로 빛과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고 또 변화하는 모습을 반영하며 변색되어 갔다.

 

전수천은 이 기차가 그리는 궤적을, 단순히 기차가 지나가는 흔적만을 좇지 않았다. 기차 칸에는 사회 각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60여명 탑승하고 있었다. 소설가 신경숙을 비롯해 사진작가 배병우, 건축가 황두진, 가수 노영심, 영화평론가 오동진, 신문기자, 함길수 여행전문가, 중학생, 주부, 미술학과 재학중인 대학생 등 한국사회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인사들이 기차에서 매일매일 다양한 대화를 나누며 담론의 장을 형성했다. 일종의 퍼포먼스와 같이 이 대화의 장은 지속됐다.

 

그리고 작가 역시 담론의 현장에 집중하며 이야기들을 경청했다. 그들의 대화는 늘 어느 방향으로 귀결됐다. 기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깥을 바라보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큰 그림으로 볼 수 없다는 것,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그제서야 우리 모두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수천의 프로젝트는 기차 내외부를 상호작용하며 이어가는 것이다.

 

무빙 드로잉 프로젝트, 2005.   ©한미경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민=전수천은 한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미술 공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무사시노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이후에는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했다.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 그는 노동과 미술을 겸하며 체류했고, 이러한 고생 끝에 얻은 동양과 서양의 경험은 전수천에게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작품이 전개됐다.

 

그 결과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란 작품으로 한국 최초의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리스 신전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업은 고분 속에 함께 수장한 토우들로 구성된 설치미술이다. 토우는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모형으로 먼 길 떠나는 망자를 외롭지 않게 보살펴달라는 따스한 의미가 담겨있다. 이 토우의 투박하고 강인한 정신성은 서구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 이후로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발전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미술활동을 선보였다. 무빙 드로잉 프로젝트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혈연도, 지연도 없는 미국 땅에서 한 동양의 미술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 끝에 다듬어 낸 결과물인 셈이다.

 

예술가의 커다란 꿈=어떠한 이익이나 상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전수천은 지금까지 한국에 전무후무한 미술가다.

 

사실 기차 안에서는 늘 좋은 이야기만 나온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2005년 한 참가자는 그의 프로젝트에 투입된 국고에 대한 비난을 하며, 예술가의 자아실현을 위해 낭비되었다고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살기에 이 프로젝트에 긍정적인 의견만을 제시할 수는 없다. 무빙 드로잉처럼 다수가 참여한 거대한 프로젝트는 더욱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무빙 드로잉프로젝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어떤 미술가가 이처럼 커다란 스케일의 작품을 꿈꾸는가, 또 실현시킬 수 있는가? 꿈을 꾸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가치는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자산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미술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20세기 후반 미국을 비롯한 국가에서는 대지미술이 미술의 한 경향으로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법을 실험하고 있었다. 크리스토와 잔느-클로드나 로버트 스밋슨 같은 미술가들이 대지 위에 큰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나 이들과 전수천의 드로잉은 같은 대지미술의 카테고리에 있지만, 분명히 다르다. 그들의 미술이 단순한 대지의 궤적으로 구성되었던 반면, 전수천의 무빙 드로잉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대지와 접점을 맺는 형식으로 직조되고 있다. 더불어 그들의 작품 못지않게 크고 대범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작가는 생전에 남과 북을 잇는 열차로 무빙 드로잉을 시도하려는 기획을 하기도 했다. 만약 이 꿈이 이루어져 북한을 지나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무빙 드로잉프로젝트가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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