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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무한계단 세트장은

수학자와 과학자가 더 흥미로워 한 M.C.에셔의 작품 떠올라 

기사입력2022-04-30 00: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다른기사보기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계단으로 이동하는 장면.

 

안진국 미술비평가(‘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작년에는 오징어 게임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2021917일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가 서비스 되는 94개국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흥행했다.

 

이 한국 드라마는 전 세계 감상자의 호감척도를 확인할 수 있는 로튼 토마토(rottentomatoes.com)에서 94%, IMDb(imdb.com)에서 8.1점이라는 높은 호감지수를 기록했다. 예전에 한국의 어린이가 즐기던 쉬운 게임이 목숨을 건 데스 게임이 되는 아이러니와 서바이벌 게임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비참한 현실 등 여러 설정과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가 전 세계인을 매료시킨 것으로 보인다.

 

초록색과 분홍색의 대비로 끌어낸 동화 같은 느낌과 감옥 같으면서도 환상을 불러오는 국적 불명의 초현실적인 공간은 순수하지만 잔인한 게임 속으로 전 세계인을 이끌었다. 특히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은 초록색 운동복을 입은 456명의 게임 참여자가, 혹은 분홍색 방호복을 입은 많은 게임 진행요원이 게임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끝없이 존재할 것 같은 계단을 줄지어 오르내리는 장면이다. 무한히 계단 이동이 반복될 것 같은 이 장면에서 M.C.에셔의 판화작품을 떠올렸다.

 

오징어 게임의 무한계단=오징어 게임은 잘 알려진 것처럼 456억원을 상금으로 받기 위해 456명의 참가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민낯과 돈을 향한 욕망을 보여주는 한국에서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다.

 

이 드라마가 흥행하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구슬치기’, ‘달고나같은 예전 한국의 어린이 놀이나 기호식품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고, 초록색 운동복이나 분홍색 방호복을 입고 드라마를 흉내 내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M.C.에셔, ‘상대성’, 1953, 석판화, 27.7×29.2 cm.<출처=위키피디아>

 

그런가 하면 예전부터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유명했던 스페인의 아파트 단지 라 무라야 하(La Muralla Roja)’는 오징어 게임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붉은 벽을 뜻하기 때문에 영미권에서 레드 월’(Red Wall)로 불리는 라 무라야 로하는 오징어 게임의 무한계단 세트장과 유사한 구조여서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 레비(Ricardo Bofill Levi)에 의해 1968년 설계되고 1973년 완공된 50가구로 구성된 이 아파트 단지는 오징어 게임에 계단 세트장과 유사한 형태의 미로 같은 구조이며, 붉은색의 외벽에 계단이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어 오징어 게임 세트장처럼 강렬한 인상을 준다.

 

오징어 게임 무한계단 세트장은 라 무라야 로하만 떠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예술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작품을 자연스럽게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사실상 그의 작품을 떠올리는 게 더 합당하다. 그 까닭은 오징어 게임의 미술감독인 채경선이 에셔의 작품 속 무한계단을 참고해서 미로 같은 이 드라마의 계단 세트장을 구상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계단은 층과 층 사이를 오르내리는 통로로, 여러 층으로 분할된 공간을 연결해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시선을 유도할 수 있다. 그래서 건축가나 수학자, 시각예술가 등이 무척 흥미로워하는 소재다.

 

에셔의 여러 작품에 계단이 등장한다. 그 중 계단의 집(House of Stairs)’이나 상대성(Relativity)’, ‘올라가기와 내려가기(Ascending and descending)’ 등의 작품에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연결된 계단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오징어 게임의 무한계단 세트장을 떠오르게 한다.

 

스페인의 아파트 단지 ‘라 무라야 로하’.<출처=www.stunninglifestyle.com>
계단의 집상대성은 계단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 외에도 중력이 기묘하게 존재하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중력을 표현함으로써 계속된 계단들이 존재하는 공간을 더욱 기이하게 한다.

 

올라가기와 내려가기3차원과 2차원의 관계를 모호하게 해 지각을 교란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면, 다시 가장 낮은 계단으로 연결되어 끝없이 무한 반복해서 똑같은 계단을 오르게 한다. 이런 계단은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유명한 SF 영화 인셉션’(2010)에 그대로 차용되어 영화의 한 장면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에셔의 비현실적 공간은 우리에게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생각하게 한다. 오징어 게임의 미술감독도 에셔의 초현실적이며 미로 같은 공간에 매료되어 그 느낌을 드라마 세트로 구현해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리카르도 보필이 건축한 라 무라야 로하도 사실상 에셔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미로 공간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리카르도 보필이 에셔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에셔의 계단 작품들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스페인의 아파트 단지 라 무라야 로하를 보면서, 오징어 게임의 무한계단 장면을 보면서 에셔의 작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수학자와 과학자가 열광한 예술가=에셔는 작품활동할 당시에 그리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가다. 1898년 네덜란드의 레이우바르던(Leeuwarden)에서 태어난 그는 건축과 장식 디자인 학교에 다녔고,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판화와 드로잉뿐만 아니라, 태피스트리(tapestries), 우표, 벽화 등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순수미술보다는 상업미술 쪽에 가까이 있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M.C.에셔,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1960, 석판화, 35.5×28.5 cm.<출처=위키피디아>
하지만 수학자와 과학자들은 에셔의 작업을 보고 열광했다.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Richard Hofstadter)는 자신의 저서 괴델, 에셔, 바흐’(1979)에서 이상한 반복(strange loop)’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바흐의 무한히 상승하는 캐논(일종의 돌림노래)’20세기 수학자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뿐만 아니라, 에셔의 판화작품을 그 예로 들었다. 그가 에셔의 작품에서 자신의 과학적 개념에 대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에셔는 많은 수학자와 교류하고 토론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미술관보다 과학박물관에서 전시되는 횟수가 더 많았다. 1953년 그가 처음으로 했던 강의에서 나는 자주 나의 동료 미술가보다는 과학적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더 가깝게 느낀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렇다고 에셔가 무명작가로 평생을 지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 중반, 그러니까 그가 50대 중반이 되었을 때, 미국에서 점차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가 유명해진 것은 사후의 일이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1972327일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그를 재조명하기 시작했고, 점차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를 독보적이게 한 표현방식은 테셀레이션(tessellation)으로, 수학적 변환을 통해 새, 물고기, 도마뱀 등의 형태를 서로 겹치거나 틈이 생기지 않게 반복해 늘어놓으면서 조금씩 변형해 점차 다른 형태가 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또한, 3차원을 2차원으로 표현하면서 지각을 교란하거나 보는 사람에 따라 그림의 전경을 배경으로, 배경을 전경으로 착시하도록 유도하는 표현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뿐 아니라, 무한 반복과 뒤틀린 공간이 주는 모호한 감정을 감각적으로 포착해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작업은 수학적이고 과학적이고 건축적이고 예술적이다. 다학제적이고 융합적인 에셔의 작품과 예술적 사유는 오징어 게임과 같은 드라마와 인셉션과 같은 영화, ‘라 무라야 로하등의 건축, ‘괴델, 에셔, 바흐등의 과학, 그리고 수학, 음악, 디자인, 순수예술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여러 분야에 영감을 주고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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