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쩍 봐서 알 수 없는 ‘무거운’ 그림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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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슬쩍 봐서 알 수 없는 ‘무거운’ 그림 만들기 위해 퍼즐처럼 무거운 그림…고근호 작가

기사입력2023-02-08 11:16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고근호, ‘조율하는 퍼즐’ 전시 전경.

조각을 하나씩 맞춰 그림을 완성하는 퍼즐. 이것을 ‘직소 퍼즐(Jigsaw puzzle)’이라고 부른다. 직소 퍼즐은 1766년, 영국인 존 스필베리(John Spilsbury, 1739~1769)가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도 제작자이자 조각가였던 그는, 지도에 재현된 복잡한 지형을 효과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이 퍼즐을 만들었다. 조각과 조각을 짜 맞춰,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내는 이 교보재(교육 훈련을 위한 보조 재료)는 땅 위에 그려진 가상의 경계를 교습하기에 적절한 도구였을 것이다.

직소 퍼즐은 내게도 익숙하다. 어렸을 때, 종종 퍼즐을 맞추며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퍼즐의 기원을 떠올려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내가 맞춘 퍼즐에는 지도 그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화, 그림, 사진 등 퍼즐 위에는 교육적인 지도 대신 비교육적인 ‘이미지’들이 대신 있었다. 1766년 영국에서 지리학 학습을 위해 만들어진 교육 도구가 단순한 놀이 기구가 되어 한국의 나에게 도착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해진다.

하나의 추측이 가능할 것 같다. 퍼즐에는 역설이 있다. 퍼즐은 조각난 그림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목적을 갖는다. 하지만 퍼즐을 완성하고자 집중할 때, 그땐 바탕이 되는 그림이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조각의 자리를 찾고 맞추는 행위,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이처럼 집중하는 동안 그림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잊힌다. 퍼즐이 지도에서 이미지로 탈바꿈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퍼즐은 그림을 행위의 재료로 삼는 기능적 혹은 유희적 사물이다. 행위 속에서 지도와 그림은 동등해진다. 재료가 된 그림은 하나의 추상이 된다.

고근호, ‘Replay Replay(Green Water#2)’.

고근호는 지난 2022년, ‘조율하는 퍼즐’(Hall1, 2022. 9.15~10.5)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다.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이었다. 층고가 높은 전시장에는 그림이 여럿 걸렸다. 멀리서 보면 그림은 하나로 통일된 추상적인 화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보면, 화면 내부에 각자 다른 질감과 붓질로 구성된 부분들이 세밀하게 합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림은 큰 것이 있었고, 작은 것이 있었다. 둘은 서로 무척 가까이 붙어 있었고, 자연스럽게 두 그림을 번갈아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큰 그림이 작은 그림을 반복하고 재배열한 결과라는 걸 엿볼 수 있었다.

이처럼 ‘조율하는 퍼즐’에는 슬쩍 봐서는 알 수 없는, 숨겨진 규칙이 곳곳에 가득했다. 보는 이를 행위하게 만드는 규칙이었다. 고근호의 그림을 보는 것은, 주어진 이미지를 나직이 관조하는 정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열심히 눈과 머리를 움직여야 하는 동적인 행위에 더 가까웠다. 숨어 있는 규칙을 파악하기 위해, 눈으로 본 것을 머릿속으로 불러와 하나씩 짜 맞추는 동안, 그림은 꼭 퍼즐처럼 느껴졌다.

이 그림은 어째서 퍼즐처럼 느껴졌던 걸까?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고근호는 의외의 단어를 말한다. 바로 스마트폰이라는 단어다. 우리 손에 놓인 이 작은 컴퓨터는 우리를 너무 산만하게 만든다. 365일 24시간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여러 어플리케이션을 동시다발적으로 확인하는 동안, 감각은 점차 옅어지는 것 같다. 스크린 밖 현실과 스크린 속 가상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가짜처럼, 반쪽짜리 경험처럼 느껴지는 상황. 고근호는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무거운 것, 슬쩍 봐서는 알 수 없는 것, 집중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 그는 ‘무거운’ 그림을 만들기 위해, 매뉴얼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었다. 그림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붓질하는 법부터 물감을 고르는 법까지 하나하나 나름의 규칙을 만들고 정립한 뒤 거기에 맞춰 작업을 제작했다. 규칙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림은 ‘스크롤’ 해서 넘어가면 그만인,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오래 보며 추리하고 추측해야 하는 무거운 이미지가 됐다.

그림을 더 무겁게 만들고자 했던 고근호의 생각은, 그림 너머 행위에 집중하게 만든다는 면에서 퍼즐과 닮게 됐다. 그림 속에 숨겨진 규칙을 추리하는 동안, 나는 전시장에서 오래 머물 수 있었다. 이미지를 평소와 다르게 소비하는 경험이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