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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놀돌 시대’…기본소득 있는 ‘주3일 휴식사회’로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소득공백 메울 방안 ‘기본소득’ 

기사입력2023-05-24 10:22
오준호 객원 기자 (munard@daum.net) 다른기사보기

오준호 기본소득당 공동대표·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저자)
호주 빅토리아주 로열 멜버른 공과대학에는 특이하게 생긴 기념탑이 있다. 기념탑 상단에 숫자 ‘888’을 조형해놓았는데, 뜻을 모르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이 탑은 ‘8시간 노동 기념탑이다. 빅토리아주 석공노동자들이 1856년에 벌인 8시간 노동제 쟁취운동을 기념해 1903년에 세웠다.

 

‘888’“8시간 일하고(labor), 8시간 쉬고(rest), 8시간은 여가를 즐기자(recreation)”를 뜻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세계 노동운동의 공통구호다. 살인적 장시간노동을 강요받던 시대, ‘888’은 하루 노동시간을 제한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지금, 우리 시대의 목표는 무엇일까? 최소한 ‘888’보다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69시간폐지 마땅

 

1930년에 경제학자 케인스는 우리 후손을 위한 예측이란 강연에서 “100년 뒤(2030)에는 주 15시간 노동이면 인간의 필요를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부의 증가에 대한 케인스의 예상은 이미 이뤄졌다. 노동시간 단축은 그의 예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진보했다.

 

우리나라는 2004년에 주 40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앞서간 프랑스는 1980년에 주 35시간제를 시작했다. 지금 주요 선진국들은 주 4일제 실험에 바쁘다. 직원 만족은 높고 생산성 하락은 없다는 보고들이 나온다. 한국은 아직 OECD 최악의 장시간노동 그룹에서도 못 빠져나왔다. 선진국과 보조를 맞추려면 부지런히 노동시간을 줄여야한다.

 

이런 흐름을 거슬러 느닷없이 ‘69’란 숫자가 나타났다. 윤석열 정부는 현 근로기준법이 주당 최대 52시간으로 제한한 노동시간(40시간+연장 12시간)을 최대 주 69시간까지 늘리는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을 제출했다. 정부는 이 개편이 근로자와 고용주에게 시간주권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쁠 때 오래 일하고 나중에 많이 쉬는제도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노동자 입장에서 시간주권이란 스스로 처분가능한 시간을 늘리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려면 총노동시간이 줄어야 한다. 반면 정부 개편안의 취지는 고용주가 사업상 필요할 때 노동자에게 장시간노동을 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고용주의 시간주권은 강화되나 노동자의 그것은 침해된다. 길게 일한 다음 그만큼 쉬면 된다고? 노동자가 고용관계의 인 점을 간과했다. 결국 연장근무를 포함해 총노동시간이 늘어날 공산이 크다.

 

더 많이 쉬고 놀고 돌보는 ‘쉬놀돌 시대’다. 시작은 기본소득 있는 ‘주3일 휴식사회’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정부는 노동시간 개편안이 청년 노동자를 포함해 광범위한 반대에 부딪치자 논의를 미루겠다 한다. 미룰 게 아니라 폐지해야 마땅하다. 시대착오적 69시간이 아니라, OECD 평균보다 연 300시간이나 많은 한국의 장시간노동을 어떻게 단축할지 논의가 급하다.

 

시간주권, 기본소득 있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노동시간을 줄여야 일과 삶의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창의성은 몰입의 경험 위에 성숙하는데, 몰입을 위해선 시간 여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노동시간이 줄면 탄소발자국도 줄어든다. 스웨덴의 연구에 따르면, 노동시간이 1% 감소하면 에너지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량은 각각 0.7%, 0.8% 감소한다. 시민이 자발적 사회참여를 위한 시간을 많이 확보할수록 사회적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자본이 축적된다. 부모의 일하는 시간이 줄면 자녀의 학교폭력이나 유사한 문제들이 감소할 것이다. 미국의 연구에선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아이들이 마약 등 약물에 손을 댈 확률이 낮았다.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공감은 분명 넓다. 정치권에서 주 4일제 정책이 나오고 일부 기업이 주 4일제를 시범 도입하는 것도 그 방증이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의 걸림돌이 있으니, 소득 공백이다. 일이 줄어든 만큼 소득도 줄면 노동자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시간 외 근무를 하거나 투잡을 뛰어야 한다. 이상적으론 임금 삭감 없이 노동시간만 줄여야겠지만 중소기업과 영세기업은 여력이 부족하다. 그러면 노동자들이 차라리 현행 노동시간 유지를 바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소득 공백을 메울 방안이 꼭 필요하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필자는 대선에 기본소득당 후보로 3일 휴식제를 공약했다. 정책의 초점을 근무일이 아닌 휴식일에 맞춰, 누구든 주 사흘은 쉴 수 있게 하자고 했다. ‘4일 근무제는 아무래도 대기업 정규직부터 혜택이 돌아간다. 반면 기본소득 있는 노동시간 단축은 프리랜서든 플랫폼노동자든 자영업자든 상관없이 쉼의 권리를 보장한다. 참된 시간주권을 돌려준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을 월 60만원 준다고 하자. 이는 한국 근로자 평균임금 5일 치와 비슷하므로 누구나 주당 1일씩 더 쉴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 또 기본소득은 노동과 연결 없이 무조건 제공되므로 그만큼 노동자의 일터 협상력을 높인다. 이 역시 시간주권에 힘을 보탠다.

 

끝으로, 노동시간 단축은 가사·돌봄의 평등한 분담과 만나야 한다. 직장 일이 줄더라도 그만큼 독박돌봄에 내몰리면 좋은 변화가 아니다. 사회학자 엘리 러셀 혹실드는 직장 퇴근 후 가정으로 출근하는 워킹맘의 현실을 두 번째 출근(second shift)’이란 개념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돌봄의 권리와 책임을 동등 분배하는 법제도, 규범의 변화와 함께 가야 한다. 물론 여기도 기본소득이 실마리를 준다. 기본소득은 사회든 가정이든 모두에게 협상력을 부여하는 수단이며 다양한 차이의 인정을 뜻하기 때문이다.

 

‘888’이 말해주듯 19~20세기는 일, 휴식, 여가의 균형부터 맞추는 것이 절박했다. 자동화로 생산성이 충분히 높아진 21세기엔 일의 비중을 낮춰, 더 많이 쉬고 놀고 돌보는 시대로 갈 수 있다. 줄여서 쉬놀돌 시대. 시작은 기본소득 있는 3일 휴식사회. (중기이코노미 객원=오준호 기본소득당 공동대표·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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