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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예술을 읽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났지만, 또 다른 고향이 있었다

예술이 당신의 고향이라면…노은님 ‘나, 종이, 붓’, 솔거미술관 

기사입력2023-08-08 09:15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다른기사보기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오기 전 경주 여행을 다녀왔다. 겨울과 봄을 지나며 지친 마음이 환기되었다. 여행 중 숙소 근처에 경주 엑스포공원이 있어 산책하다가 어슬렁거려 봤다. 공원 안에 미술관이 있었다.

 

작가라면 응당 어디서든 작품을 마주칠 준비가 되어야지.’

 

한 걸음 성큼 다가가 진행 중인 전시의 목록을 살펴보는데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노은님.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었던 작가였다. 우리가 여행하던 시기는 원래 전시 폐막 이후의 기간이었으나, 운이 좋게도 전시가 연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행에 함께한 친구와 함께 긴긴 숲길을 지나, 조각들이 놓인 길목을 지나 솔거미술관에 도착했다. 미술관은 아주 고요하고 조용한 숲길 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종이, ’. 싱거운 전시 제목. 그러나 간결하고 정직한.

 

‘나, 종이, 붓’ 전시 전경. <사진제공=솔거미술관>

 

전시는 몇 개의 작은 방과 아카이브 자료로 꾸려져 있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와서 우리가 보았던 작품은 나무인간’(1987)이었다. 커다란 캔버스 천에 팔을 벌리고 있는 인물 형상이 보였다. 배경을 채우고 있는 휘몰아치듯 생생한 붓질을 보며 나와 친구는 감탄했다. 전시장에는 이 외에도 여러 점의 그림과 모빌, 실로 만든 입체 작업 등이 놓여있었다. 고요한 미술관의 큰 창을 통해 햇빛이 많이 들었다. 군데군데 작가가 쓴 글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고, 필체를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해 봤다. 작은 동물 모양 도자기들과 옛 자료들을 보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예기치 못하게 멋진 전시를 봤어.” “맞아 정말 근사했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우리는 종종 노은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와 내가 감응한 것이 같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며.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난 노은님은 1970년 독일 근무 간호보조원을 자원해 한국을 떠났다. 병원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남는 시간을 지새우기 위해 문구 코너에 가서 화구를 사고, 시간 나는 데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침대 밑에 차곡차곡 그림을 쌓아두던 그는 동료 간호사의 권유로 근무하던 병원 회의실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함부르크 국립 조형예술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 이후 작가의 삶을 살아갔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라 느껴진다. , 물고기, , 나무, 풀 그리고 동물들. 작품 속에는 주로 자연과 함께하는 것들이 그려져 있다.

 

노은님, ‘나무인간’(1987), 설치 전경. <사진제공=솔거미술관>

 

학생 때 전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작가의 영상작업을 본 적 있었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미소 띠는 얼굴을 보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이후에 도서관에 가서 작가가 쓴 책을 찾아 뒤적거렸다. 책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내 고향은 예술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지만, 정작 그려진 것들 앞에서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 세상의 시급한 문제 앞에서, 캔버스 앞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이기심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림을 보며 이것이 과연 현대적인 미술인가?’ 질문하곤 한다. 목소리 낼 수 없는 것들이 많은 현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이 도무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그림을 보다 보면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그러나 노은님의 작품 앞에서는 그 질문을 모두 잊었던 기억이 있다.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이며, 화가는 다른 방식으로 생을 바쳐 이 세상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수필 귀머거리 세월이 지나가다에서 노은님은 오랜 세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싸워왔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싸움은 영혼이 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책의 제목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 외로움을 짐작하게 돼 한없이 슬퍼진다. 그림과 삶을 포개보며 사실 그의 고향은 따로 있었노라 자연스레 알게 된다. 노은님에게 많은 날의 고민으로부터 예술이라는 고향이 운명처럼 스몄다는 것을. 나고 자란 곳을 떠났지만, 실은 그에게는 예술이라는 또 다른 고향이 있었다고. 누군가가 생을 시작했을 때 생기는 자리처럼 그냥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경주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영상 속 한 구절을 되새긴다. “무당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당이 된다. 그렇게 무당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작가가 작년 영면에 들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았다. 이제 노은님의 고향은 예술,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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