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기록, 권력을 감시, 조작을 폭로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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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진실을 기록, 권력을 감시, 조작을 폭로한 ‘예술’ 진실을 맵핑하는 예술…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

기사입력2025-03-12 10:4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한때 예술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영역으로만 인식되었다. 화가의 붓과 조각가의 손은 현실을 초월한 형상을 빚어낸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은 단순한 심미적 체험을 넘어, 사회적 진실을 기록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역사의 조작을 폭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예술은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증거가 되고, 고발이 되며, 저항의 도구가 된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전쟁의 참화’(1810~1820) 연작을 통해 나폴레옹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해 폭력과 억압의 실상을 고발했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는 파시즘이 초래한 참상을 강렬한 시각적 언어로 표현해 예술이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나치 선전을 해체하는 시각적 무기가 되었으며,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과 같은 큐레이터들은 전시 자체를 정치적 선언으로 변모시켰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진실을 기록하고 고발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물감 대신 데이터를, 붓 대신 위성사진을, 캔버스 대신 법정을 활용하는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의 작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데이터를 예술로=포렌식 아키텍처는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실을 구축하고 기록하는 연구집단이다. 건축가이자 학자인 에얄와이즈먼이 2010년에 설립한 이 단체는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국가적 폭력, 인권침해, 환경파괴 등의 사례를 조사해왔다. 건축가, 작가, 영화제작자, 저널리스트, 소프트웨어 개발자, 과학자, 변호사 등 다양한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는 ‘포렌식 아키텍처’는 그 명칭이 시사하듯, 이들은 ‘법의학적, 과학적 범죄 분석’(forensic)과 ‘건축적, 공간·환경적 연구’(architecture)를 결합해 사건을 조사하는 연구방식을 활용한다.

2021년 맨처스터 Whitworth Art Gallery에서 개최된 포렌식 아키텍처의 ‘Cloud Studies’ 전시 전경, Michael Pollard. <출처=www.1854.photography>

이들은 사건 발생지역과 건축 환경을 3D모델로 복원하고, 애니메이션과 지도 제작을 활용해 해당 공간을 시각화한다. 또한 텍스트, 동영상, 인터랙티브 콘텐츠르 활용해 조사 내용을 문서화하고 시청각 자료로 구성해 법적 증거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연구집단과 예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포렌식 아키텍처 대부분의 작업은 특정한 사건을 제시하고, 이와관련된 시청각적 증거를 수집·분석해 사건의 경위를 재구성하고 시각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예술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이미지를 활용해 정확한 사실을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예술적 표현과 맞닿아 있으며, 그 결과 2018년 ‘터너상 (Turner Prize)’ 후보에 올라 테이트 브리튼에서 작업과정을 전시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뉴스리플리에게’(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불온한 데이터’(국립현대미술관서울) 등의 전시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포렌식 아키텍처 작업은 단순한 저널리즘이나 다큐멘터리 제작과는 다르다. 이들은 국가와 대륙의 경계를 넘나들며, NGO, 인권단체, 활동가, 미디어 등과 협력하는 동시에,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커뮤니티 및 사회단체들과도 긴밀하게 소통하며 조사를 진행한다. 현장에 남겨진 흔적과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하는 한편, 첨단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출처에서 정보를 확보하고 분석한다.

특히, 위성통신 기술의 발전, 원격감지 시스템의 공공 가용성 증대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편화에 따른 디지털 기록 장비의 대중화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드론 영상, SNS에 업로드된 이미지와 영상, 뉴스 보도, 위성 이미지 등 개별적으로 흩어진 정보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해 감춰진 진실을 드러낸다.

◇진실을 되찾아주는 예술=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가 수행하는 조사는 단순한 기술적 분석이 아니다. 이들의 연구는 실질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포렌식 아키텍처가 밝혀낸 증거는 인권 분쟁의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위한 도구가 되고, 분쟁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잊히지 않을 기록이 된다. 또한, 국가 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에게 사회적·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정의를, 누군가에게는 기억을, 누군가에게는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작업인 것이다.

예를 들어, 2015년 선보인 ‘가자 플랫폼’(Gaza Platform)은 ‘한니발 지령’으로 알려진 이스라엘군의 특정 군사작전을 폭로하는 데 기여했고, 그 결과 해당 지령은 공식적으로 중단됐다.

포렌식 아키텍처가 ‘가자 플랫폼’을 개발하기 위한 작업 이미지 ‘The Architectural-Image-Complex’, 2015, Forensic Architecture.

2014년 7월 8일,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대상으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7주간 이어진 이 공격으로 총 1만1000여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그중 2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피해자의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

이에 포렌식 아키텍처는 2015년 국제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와 협력해 이스라엘의 군사작전 데이터를 분석하고 공격 패턴을 조사했다. 라파시에서 발생한 수백 건의 폭발 장면을 담은 휴대전화 영상을 수집·분석해 폭탄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을 추적함으로써 공습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고 이를 맵핑했다. 추가로, 보도 사진과 영상, 목격자의 증언, 위성사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정밀한 검증을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개발된 ‘가자 플랫폼’은 이스라엘군의 군사작전을 시각화한 프로젝트로, 이스라엘, 이탈리아, 프랑스의 고등법원에서 프레젠테이션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포렌식 아키텍처는 시카고 사우스쇼어 지역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하리스 어거스터스(Harith Augustus) 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2018년 7월 14일, 다섯 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는데, 이때 그는 총기 면허증을 손에 쥔 상태였고, 총은 권총집에 있었다. 당시 시카고에서는 2014년 17세 흑인소년 라쿠안 맥도날드(Laquan McDonald)를 권총으로 사살한 경찰 제이슨 반 다이크(Jason Van Dyke)의 재판을 앞두고 있어,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이 때문인지 시카고 경찰청은 사건 발생 당일 신속히 성명을 발표하며, 이 사망 사건이 ‘무장 대치’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항의와 시위는 밤새 이어졌고, 다음 날까지도 지속됐다. 시카고 경찰청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이례적으로 사건 당시의 영상기록을 빠르게 공개하기도 했다.

2019년, 포렌식 아키텍처는 인비저블 인스티튜트(Invisible Institute)와 협력해 이 사건을 면밀히 분석했다. 이들은 어거스터스가 사망한 순간을 여섯 가지 서로 다른 시간적 관점으로 재구성해, 경찰 폭력의 다양한 측면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조사 결과를 ‘2019 시카고 건축 비엔날레’에 전시하며, 경찰의 공식발표와는 다른 진실을 드러냈다.

이 외에도 이들은 다양한 사건을 조사해왔으며, 그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렌식 아키텍처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도, 조각을 만들지도 않는다. 이들은 숨겨진 폭력을 드러내고, 권력이 지우려는 기억을 복원하며, 진실을 데이터로 구축한다. 이로써 이들은 우리에게 예술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게 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