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비추는 ‘수태고지’…세상과 연결된 아침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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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햇살 비추는 ‘수태고지’…세상과 연결된 아침을 맞다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산책…베아토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기사입력2022-02-08 10:36

겨울의 피렌체는 습기로 축축한데다, 찬바람이 불어 을씨년스런 추위가 기분 나쁘게 뼈마디에 파고 듭니다. 유럽의 겨울은 길고 지루한 날씨 탓에 기분도 우울해집니다. 난방이 안되는 집에 앉아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면 정수리 언저리에 하얀 김이 서릴 만큼 몸이 시려오기에, 해가 반짝 뜬 오후엔 잠시라도 밖에 나가 해를 쬐는 것이 좋습니다. 2월의 오후에 따스한 햇빛을 찾아 거리 산책에 나서면, 햇살처럼 포근한 느낌이 그리워집니다.

베아토 안젤리코 ‘수태고지’, 1445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피렌체 시내 두오모 성당 옆 골목길을 접어들어 걷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산 마르코 수도원, 그곳에 가면 겨울의 짧은 햇살이 주는 가벼운 따스함과 어울리는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곳에 살았던 수도사 화가 베아토 안젤리코(1389~1455)가 그린 벽화 ‘수태고지’입니다. 1436년부터 그가 살았던 산 마르코 수도원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후원으로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저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메디치의 대부 코지모가 낡았던 수도원을 1400년대 새로운 스타일로 재건축하는데 적극적이었던 걸 보면, 이 곳은 수도사를 위한 수도원 일뿐 아니라 피렌체 시민들의 안식처로도 중요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최고 권력가이자 재력가였던 코지모 메디치는 이 수도원 북쪽 복도 끝에 자신의 기도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잡한 정치 암투와 교황에게 빌려준 돈의 이자를 받아내는 일 같은 골치가 아픈 메디치 은행 업무보고를 받고, 무엇보다도 병약했던 장남 피에로 메디치의 건강 문제로 마음이 심난할 때마다 그가 찾았던 작은 기도실에는 베아토 안젤리코의 ‘동방 박사의 경배’가 걸려 있습니다.

산 마르코 수도원은 오후 1시까지 관람할 수 있기 때문에, 오전 산책 겸 두어 시간을 둘러보기 좋은 곳입니다. 붉은 빛의 벽돌 바닥과 베아토 안젤리코의 벽화를 제외하고는 아무 장식이 없는 회벽으로 둘러친 그의 기도실은 특별히 건축가가 설계한 천창에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가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600년 전에 지어진 기도실에 앉아 나의 흐트러진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 좋은 곳입니다.

이 수도원은 명상과 묵상을 하며 살아온 수도사들의 분위기가 남아 있어 안뜰에 들어서면 평온한 고요함이 다가옵니다. 그 평온함은 묵상을 바라볼 수 있는 수도원의 46개 벽화에도 깃들어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벽화 ‘십자가형’에서 베아토 안젤리코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장면을 비극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희생이 주는 의미를 이해하려는 듯 그에게 다가가 마지막 신음 소리를 들으려는 도메니코 수도사 안토니오 성인의 묵상을 담았습니다.

베아토 안젤리코 ‘십자가형’, 1442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무릎 꿇은 안토니오 성인 사이에는 파랗고 깊은 하늘만 있습니다. 이 파란 배경은 신의 공간에서 신의 섭리를 묵상하는 안토니오의 영혼이 머문 공간이자, 그가 신을 만나는 영혼의 장소를 은유한 것입니다. 회벽 위에 칠해진 파란색은 여러 겹을 덧발라 평면보다 더 깊은 공간처럼 보입니다. 그 파란 공간이 수도사들의 묵상 세계입니다.

초록 잔디와 나무로 둘러싸인 수도원 안뜰을 지나 수도사들이 거주하던 2층을 향해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만나는 작품이 명작 ‘수태고지’입니다. 이 작품은 베아토 안젤리코가 그린 4개의 ‘수태고지’ 버전 중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깊어가는 영성과 예술에 대한 철학이 스며있는 작품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내려와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를 예수라 하라” 하며 임신 소식을 알려주는 ‘수태고지’ 장면은 구약의 시대가 끝나고 신약 성경의 시대가 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1400년대 경제적인 부흥과 함께 유례없이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았던 피렌체가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을 예수가 지상에 왔던 시대로 상징하면서 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그림은 르네상스 초기에 가장 많이 그려졌습니다. 이 시기에 성당 제단화에는 성모 마리아의 ‘이콘화’ 대신 아름다운 천사와 함께 서 있는 마리아 그림이 장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베아토 안젤리코처럼 겸손하고 소박한 마리아는 드물었습니다. 그가 1440년에 완성한 이 그림은 부드러운 아치와 나즈막한 기둥으로 세워진 르네상스 건축 공간을 소박하게 묘사합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는 경건하며 친근한 수도원 공간 안에,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천사의 방문을 받는 마리아는 놀람과 두려움에 동요하는 감정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사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화답하는 마리아의 영혼에 물든 듯 조용히 내려앉아 겸손하게 인사를 전합니다. 베아토 안젤리코는 이 작품에서 특히 마리아의 영혼과 천사의 영혼이 교감하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르네상스 미술이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호기심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작가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수도사로서 그림을 그리기 전에 묵상을 잊지 않았다는 화가의 습관대로 그는 기도로 교감하는 영혼들의 대화를 소박한 장면 안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부드럽고 고운 선들, 파스텔톤의 색감들이 마리아 영혼의 투명함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산 마르코 수도원 벽화가 더욱 특별한 것은 벽화의 위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쪽에 창문이 있어 매일 오전이면 천사의 등 뒤에서 마리아의 가슴까지 환하게 비춰주는 아침햇살을 볼 수 있습니다. 소박한 수도사의 방마다 아름다운 벽화들이 그려진 수도원의 긴 복도를 걸으며 잠시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아침 햇살이 비추는 ‘수태고지’ 앞에 서면, 세상과 단절된 수도원이 아닌 세상과 연결된 수도원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이다 미술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