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간에서 온 것들과 마주할 때 느끼는 시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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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다른 시간에서 온 것들과 마주할 때 느끼는 시차 마주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상황을 마주해보는 것이 필요할지도

기사입력2024-05-16 10:0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근 한 달간 숨 가쁘게 일하다 보니 휴가의 기억이 흐릿해졌다. 그간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었고,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걸까. 과거의 시간을 더 선명히 되살리려면 찍어 둔 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메라와 필름이 있으면 많은 것을 더 많이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러 이유로 아직이다. 기존에 갖고 있는 카메라가 상을 또렷하게 맺지 못해 계속 대안을 찾고 있다. 서랍에 보관된 미개봉 필름에 마음이 쓰인다.

프로젝트를 위해 이베이(e-bay)에서 1970년대 소련에서 만들어진 Super 8 비디오카메라를 주문했고,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난 뒤 받았다. 러시아를 경유하지 못하는 탓에 평소보다 오래 걸려 도착했지만, 나에게는 이제 세 대의 카메라가 있다. 지난 휴가 때 찍은 필름 한 카트리지와 새로 받은 카메라를 들고 현상소로 향했다.

아직 데면데면한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촬영이 완료된 필름을 건네고 새 필름 열 카트리지를 받았다. 잠시 침묵. 조금 뻔뻔하게 새로 산 카메라를 들이밀고 작동법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니, 사장님이 카메라를 점검해 줬다.

“노출계가 작동하지 않아 촬영하시기 어려울 거 같은데요.”

오랜 기간 찾아보며 긴 기다림 끝에 받은 카메라였기에 잠깐 사이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원인이 뭘까요? 혹시 고칠 방법이 있을까요?”

“아마 어려우실 거예요.”

<촬영=박선호>

우리는 이리저리 카메라를 살펴보며 머리를 싸맸다. 다행히 완전하진 않지만 촬영이 가능한 걸 확인했다. 이 카메라로는 롱 테이크(long-take) 숏을 찍을 수 없다.

또 불완전함과 마주했다. 매번 이렇게 카메라, 필름과 씨름하다 보니 지칠 때가 있다. 촬영한 결과물을 받아볼 때는 늘 실망스러운 감정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 카메라로 영상을 수년간 찍어봤기에 촬영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필름 작업을 시작하고 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물을 받는다.

영상을 찍을 때의 들뜸과 기쁨이 사그라질 때쯤 현상을 맡기다 보니 필름에 담긴 것을 너무 늦게 확인하게 되고, 대체로 예상한 장면과는 많이 다른 결과물을 받는다. 예컨대, 거친 입자의 필름으로 찍은 흐린 날이 예상보다 더 우중충한 이미지로 기록이 된다던가 말이다(필름은 빛에 예민하기 때문에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상이 흐리게 맺힌다). 촬영한 시간과 데이터를 받는 시간 사이 시차(時差)를 통해 카메라의 눈과 내 눈 사이 시차(視差)를 확인한다. 다른 시간대를 사는 물건, 시간, 기억. 올해의 프로젝트는 이 얽히고설킨 어려운 상황과 맞서야 하는 것처럼 느낀다.

새로 만들어진 것은 (비록 그것이 또 금방 고장 나서 새것으로 대체되더라도) 금방 고칠 수 있다. 애프터 서비스의 완벽함은 좋은 기업과 그렇지 않은 곳을 나눈다. 어쩌면 우리가 더 많이 발전한 사회에 살며 누릴 수 있는 특권지도 모른다. 고칠 수 없는 8mm 카메라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필름 현상소처럼, 미결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을 누군가 포기하게 되면 그것들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다. 이는 카메라와 필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있는 많은 것들에도 마찬가지 일 테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서 온 것들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시차를 마주하기를 포기하지 않기. 어쩌면 뭔가를 잘 찍는 일보다 계속해서 이 상황을 마주해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현상소에 다녀온 지 삼일이 지나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나 흐릿하게 촬영됐고,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녹화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2분30초 길이의 영상에는 어느 시점에 내가 보았던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는데, 영상을 돌려보니 그때의 내가 어떤 인상을 담고자 했던 것 같이 느껴졌다. 긴 이동 뒤에 비로소 도착한 방에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던 것.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 따듯하고 안락한 것. 가쁜 숨 사이 찾은 공백 같은 것. 시선이 닿았던 곳에 그런 것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