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흥분…거인들의 궁전에서 오후를 보내다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환상, 흥분…거인들의 궁전에서 오후를 보내다 ‘떼 궁전’ 벽화를 통해 본 줄리오 로마노의 마니에리즘 미술

기사입력2022-04-11 10:21

이탈리아는 예술의 나라입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시대의 미술이 도시들마다 특색있게 발전해 왔습니다. 로마는 고대 로마의 유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고, 베네치아는 이국적인 비잔틴 문화가 도시를 더욱 빛내기도 합니다. 작은 도시국가들이 번영했던 15세기나 16세기에는 도시국가의 통치자 취향에 따라 독특한 미술이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도시마다 이색적인 볼거리가 풍부하기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그런 이탈리아의 이색적인 볼거리 중 흔하게 접하지 못하는 마니에리즘 미술을 볼 수 있는 재밌는 궁전이 있습니다. 바로 만토바의 떼 궁전입니다.

마니에리즘(Mannerism)

르네상스 미술의 방식이나 형식을 계승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매너 혹은 스타일)에 따라 예술작품을 구현한 예술사조를 말한다. 후대에 이들의 미술을 ‘매너리즘’이라고 부르게 됐다.

북부도시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던 몇 년 전, 이름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던 ‘떼’ 궁전을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한 4월에 찾았습니다. Te(이탈리아어 발음으로 ‘떼’라고 읽는다)는 오두막을 뜻하는 Tegia라는 라틴어의 줄임말로, 이곳이 오두막 촌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떼 궁전은 북부의 작은 도시 만토바에서도 도시 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토바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10대 가문 중 하나인 곤자가 가문이 1300년대부터 통치하기 시작했고, 1400년대부터 1600년대 중반까지 경제적인 풍요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리며 르네상스 미술과 특히 마니에리즘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곤자가 가문은 빅토리노 다 펠트로라 부르는 훌륭한 인문학자를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두어, 인문학 바람이 불기 시작한 1400년대 중반에 다른 도시국가들보다도 먼저 교양과 지성을 갖춘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 교육을 받은 곤자가의 자녀들은 고전적인 르네상스 문화뿐 아니라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마니에리즘 미술까지 소위 고급취향에서 현대취향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문화를 소화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524년에 만토바 백작 페데리코 곤자가 2세는 이곳에 휴식을 위한 별장을 짓고 싶어 줄리오 로마노를 초대합니다. 줄리오 로마노는 당시 가장 유명한 예술가 라파엘로가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1520년에 라파엘로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자 미술계는 일대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완벽한 비례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희열을 느끼던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에서 지휘자를 잃은 것처럼 라파엘로의 제자들은 방황하며 하나둘 로마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건네받은 만토바 백작의 초대는 줄리오 로마노에게 분위기를 쇄신해 줄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는 흔쾌히 초대를 수락하고 만토바의 새 후원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떼(Te)’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인의 방’은 줄리오 로마노가 가장 마지막에 그린 벽화다. 올림푸스 신을 향해 오르려는 제우스와 거인들의 치열한 사투가 묘사돼 있다. <사진제공=이다 미술역사가>

페데리코 곤자가 2세는 이사벨라 에스테의 아들입니다. 페라라 영주의 딸이자, 당시에는 드문 여성 예술 후원자였던 이사벨라 에스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대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할 만큼 르네상스 문화계에 영향력 있는 후원여성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문화적 취향을 적당히 물려받은 페데리코 곤자가 2세는 만토바에서도 늪지였던 이 버려진 땅에 멋진 저택을 짓기로 합니다. 그는 특히 승마를 좋아했는데, 말 훈련장과 승마경기를 즐길 수 있고 사람들과 레크레이션을 즐길 수 있는 말그대로 놀이공원을 짓고 싶었습니다.

줄리오 로마노는 로마 외곽의 커다란 별장들에서 보았던 고대인들의 취향과 자신의 파격적인 마니에리즘 양식을 모두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위해 10년 동안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떼 궁전은 4개의 문이 있는 직사각형의 형태로 단층의 빌라 4개동이 지어져 있습니다. 빌라와 빌라 사이는 로지아라는 아치형 아케이드로 연결되어 있는데, 건물 내부에서 다른 건물로 갈 때 정원을 나갔다가 다시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형식입니다. 이런 형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떼 궁전을 돌아다니다 보면 날씨가 좋은 이탈리아의 풍경과 정원의 한적함을 소소히 산책하는 ‘소확행’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제가 갔던 날도 날씨가 좋아 건물을 나올 때마다 흰 조각구름이 인상적인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봄향기를 만끽했습니다.

내부 건물에서 재미있는 공간 중 하나가 ‘말들의 방’입니다. 여기에는 페데리코 가문의 초상화와 그들이 아끼는 말들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말의 모습을 백작의 초상화와 함께 그려넣은 것이 인상적입니다. 가족을 아끼기로 유명한 곤자가 가문에게 가족이란 기르는 동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곤자가 가문의 저택에서는 심심찮게 기르는 강아지와 말들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프쉬케의 방’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이 방의 벽화에는 전쟁의 신 마르스와 비너스의 사랑 이야기와 사랑의 신들이 벌이는 연회 축제가 위트있게 벽 전체를 채우고 있습니다. 이곳은 점심 만찬을 하는 식당이었는데, 페데리코는 연인 이사벨라 보스케티를 위해 이 공간을 꾸민 만큼 아름다운 사랑의 신의 얼굴에는 그녀의 초상화가 담겨 있습니다.

페데리코 가문의 초상화와 아끼던 말들이 함께 그려진 ‘말들의 방’. <사진제공=이다 미술역사가>

‘떼 궁전’이 마니에리즘 미술의 전형적인 궁전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거인의 방’ 때문입니다. 이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인의 방’은 줄리오 로마노가 가장 마지막에 그린 벽화들로 제우스와 올림푸스 신을 향해 오르려는 거인들의 치열한 사투가 묘사돼 있습니다. ‘거인의 방’에 들어가면, 눈앞에 거대한 거인들이 올림푸스로 오르려고 기둥을 부러뜨리고 서로를 밟는 아수라장의 벽화를 마주 보게 됩니다. 거인족들은 이제 막 제우스신이 내리친 번개 광선으로 무너진 기둥 사이에서 놀라 하늘을 쳐다봅니다. 백 명의 거인들을 번개로 단숨에 제압하는 제우스의 위력과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듯 순진하게 쫄아있는 거인들의 표정이 이 공간을 더욱 흥미있게 만드는 곳입니다.

줄리오 로마노는 근육이 불끈 솟은 거인들의 몸과 벽면을 타고 피어있는 구름 사이에서 제우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하늘의 나팔수를 어지럽게 그려 넣었습니다. 이 방에 들어서면 거인의 크기 때문에 나의 모습이 정말 난장이만큼 작게 느껴져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공간입니다. 방의 모서리마다 거인들과 구름이 엉켜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서 네모난 방의 모양을 전혀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천장까지 솟아있는 구름을 보면 거인들의 세계에 들어온 듯 환상적인 착각을 하게 만드는 흥분되는 공간입니다.

줄리오 로마노는 현실이 아닌 상상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눈앞에 펼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은 예술가가 설령 기발한 상상력을 갖는다고 해도 후원자나 그릴 공간이 없다면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534년, 바로크 미술이 시작되기도 훨씬 전에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 만토바에서는 인간의 상상력과 놀이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를 통치자의 센스로 창조한 최초의 놀이동산이 만들어졌습니다.

만토바의 ‘떼 궁전’에서 봄날 오후를 즐긴다면, 르네상스 미술의 절정에 예술이 얻은 상상력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이다 미술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