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공간의 디테일”…현실 알고 싶다면 관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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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인간 공간의 디테일”…현실 알고 싶다면 관찰하라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 얀 반 에이크의 걸작 ‘헨트 제단화’

기사입력2023-04-10 15:25

르네상스 미술이 주는 감동이 나의 삶을 오랫동안 위로해 준 탓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탈리아 피렌체를 벗어나 또 다른 르네상스 미술의 도시를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한동안 코로나로 인해 유럽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지만, 따뜻한 서풍이 눌러앉은 겨울바람을 녹이는 기운을 좇아 북유럽 미술여행을 시작했습니다. 3월 초는 아직 미련을 못 버린 북풍의 심술이 벨기에의 광장에 남아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은 벌써 봄을 맞아 설레입니다.

북유럽의 마사초라 불리는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걸작 ‘헨트 제단화’를 보러 가는 길은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기대감으로 가득했습니다. 벨기에 도시 헨트의 중앙역 신트피터스역(Station Gent-Sint-Pieters)에 내리면 자전거 주차장이 보입니다. 2층으로 쌓은 자전거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말 그대로 산더미 같습니다. ‘저 자전거 중 하나를 타고 헨트를 누비는 것도 재밌으리라’ 그런 날을 상상하며 터벅터벅 시내 중심을 향해 걷다 보면, 성 바보(San Bavone) 대성당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브라반트 고딕 양식의 높고 웅장한 첨탑이 보이죠. 브라반트 고딕 양식은 브라반트 공국의 전성기였던 14세기, 중세 고딕 양식에 지역색을 입혀 만든 벨기에 양식입니다. 회색돌로 쌓아올린 육중한 첨탑이 성당 입구에 자리한 모습은 마치 신이 아닌 왕의 궁전 같은 인상을 줍니다.

성 바보 성당은 1228년부터 건축되었지만 초기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기에 성당의 제단 아래에는 널찍한 지하공간이 있습니다. 벨기에 문화재청에서는 코로나 기간에 미술작품 관람에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였는데, 바로 이곳에서 ‘헨트 제단화’의 역사를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3D 전시입니다. 입장료를 내고 지하로 내려가면 성당을 받치는 기둥만 있는 지하공간에서 3D 안경을 내어줍니다. 그것을 쓰자마자 친절한 영어 안내와 함께 오직 내 눈앞에만 ‘헨트 제단화’에 대한 흥미로운 영상이 보이죠. 사람들은 빈 공간 앞에 서서 나만의 미술관에 빠져들며 15세기 얀 반 에이크 형제의 공방을 탐방하고 제단화 제작 과정뿐 아니라 플랑드르의 걸작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까지 600년을 20분 동안 여행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시간 여행을 통해 천재 예술가의 숨결과 열정을 고스란히 만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죠.

얀 반 에이크·유베르트 반 에이크의 ‘헨트 제단화:신비한 어린 양에 대한 경배’, 1425년~1432년, 375×258cm, 헨트 성 바보(San Bavone) 성당.

흥분과 기대가 뒤범벅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오히려 천천히 돌계단을 올라 제단화가 있는 예배당까지 수도자의 마음으로 걷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순간적인 감정보다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기 위해 코르틸레(cortile, 수도원 중정)의 긴 복도를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벌었다고 합니다. 또각또각 걸어가며 영상으로 먼저 ‘헨트 제단화’를 보고 원본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혀 봅니다.

온도조절 장치가 있는 커다란 유리 안에 거대한 10폭 제단화가 밝고 윤기나는 색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양쪽 창문에 달린 스테인드글라스의 다채로운 채광이 공간에 색의 향연을 만들어 ‘헨트 제단화’는 더욱 신비롭게 보이죠. 부르고뉴 공국의 선량공 필리프 3세(1396~1467)의 궁정화가였던 얀 반 에이크의 형인 유베르트 반 에이크가 1425년 주문받고 제작하다가 1년 후 갑자기 죽게 되자, 동생 얀 반 에이크가 이어받아 7년 동안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얀 반 에이크가 유화 기법을 향상시켜 만든 초기 작품이기 때문에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동시대에 제작된 피렌체 르네상스의 선구자 마사초의 벽화 ‘브랑카치 예배당’과 비교해 볼 때 정교함과 색채의 생동감이 뛰어납니다. 프레스코화가 가진 시간적이며 기술적인 제약을 극복한 미술의 혁신을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작품 제목은 ‘신비한 어린 양에 대한 경배’이며, 얀 반 에이크는 인류에 대한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새로운 구성과 놀랍도록 사실적이고 섬세한 표현법으로 완전히 재해석합니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을 했던 20세기 독일의 건축가 루트비히 반 데어로에는 아마 얀 반 에이크의 이 작품에서 디테일의 힘에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요. ‘헨트 제단화’에 그려진 디테일을 감상하다 보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사후세계만큼이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르네상스 시대를 이해하게 됩니다. 마사초가 원근법으로 인간의 현실공간을 이상적으로 재현했다면, 얀 반 에이크는 인간의 공간을 디테일하게 그려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현실세계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만들죠.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반 장님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현실을 알고 싶다면 우선 관찰하라’는 의미를 일깨워 준 것입니다.

플랑드르 지역의 제단화는 여러 폭의 그림들 사이에 경첩을 달아 접을 수 있게 만든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추운 지방에서 습기가 가득한 성당 안에 중요한 그림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지혜일 것입니다. 그림이 닫힌 상태에서도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뒷면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의 뒷면에는 수태고지(성모영보) 장면과 후원자의 초상화가 있죠. 10폭 제단화에 14개의 그림이 있으니 그림을 보는 순서를 따로 정해 두었습니다. 성경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도 그렇겠지만 작가가 주제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나는 장인이 아닌 예술가’라는 자부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어진 원칙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대로 화면을 창조하는 예술가라 스스로 여겼으니까요.

닫힌 상태의 ‘수태고지’ 장면을 열면 드디어 화려하고 생명력 넘치는 르네상스 유화 작품이 나옵니다. 상단부 중앙에 그려진 세 인물은 황금색 배경을 담아 초월적인 세상 속 인물이 되었고, 하단부 중앙은 초록색 풍경에 담아 땅에서 일어나는 오묘함을 담았습니다. 상단부 중앙의 세 인물은 삼중관과 축복의 세 손가락을 든 만인의 왕 그리스도, 파란 옷에 화관을 쓴 마리아, 수염이 긴 야성적 이미지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들의 등장은 전형적인 비잔틴 도상학에 나오는 Deisis(데시스)입니다.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향해 인류 구원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죠. 북유럽이 이탈리아보다 여전히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 중세의 기운이 더욱 강력한 지역 분위기를 짐작케하니 참 흥미롭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엄격한 청교도 정신으로 이어진 걸까요? 무엇보다 마리아의 왕관은 화려함과 디테일의 향연입니다. 진주와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고 순결과 아름다움의 상징인 백합, 장미 역시도 아름답고 정교합니다. 진주 표면에서 반짝이는 빛을 통해 얀 반 에이크는 ‘자연의 빛’이 머무는 인간의 세계를 깨달게 하죠.

하단부 중앙이 제단화의 주제 ‘신비한 어린 양에 대한 경배’입니다. 중앙의 붉은 제단 위에 황금빛 후광을 두른 양이 있습니다.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는 양의 눈빛은 상단부의 예수의 눈빛이 주는 위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솟구치는 피가 성배에 담깁니다. 카톨릭 미사 중에 행하는 성찬 전례의 의미가 담겨 있죠. 얀 반 에이크 시대 사람들에게도 매주 봉헌되는 전례의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어린 양의 피가 성배에 담겨 보혈이 됨을 그린 것입니다.

하늘에는 성령의 비둘기가 온 세상에 빛을 비추고 분수에서는 구원의 선물로 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넘칩니다. 푸른 초록이 무성한 땅에 천사가 경배하고 서로 다른 사연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얀 반 에이크는 그들의 모습 하나하나 캐릭터의 개성과 정교한 의상, 미묘한 표정까지 디테일하게 살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신비로운 어린 양 앞에 모여드는 이 장면은 르네상스 미술의 중요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질서입니다. 인간의 어지러운 생각이 ‘이성’으로 정리된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질서는 수많은 인파를 4그룹으로 나누어 균형감있게 배치하는 화면의 질서로 표현되었습니다.

얀 반 에이크와 마사초의 혁신은 북유럽과 이탈리아간 거리의 제약을 녹여 버리고 세상을 향한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의 열정으로 15세기를 이끌었습니다. 초정밀한 디테일을 창조한 화가의 눈은 홀로그램 기술을 개발한 현대인의 관찰력과 오묘하게 닮은 듯, ‘헨트 제단화’ 앞에 서니 홀로그램이라는 21세기의 첨단기술과 600년 전의 예술이 맞닿는 신비로움을 경험합니다. 홀로그램 영상 시스템과 원작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얀 반 에이크의 ‘헨트 제단화’를 인생 버킷 리스트에 추가합니다. 또 보러 가겠다는 결심을 담아서. (중기이코노미 객원=이다 미술역사가, ‘인간을 탐구하는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