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돼지기름…외형에 집중하는 상업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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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예술 ㅣ 예술경영 초콜릿·돼지기름…외형에 집중하는 상업주의 초콜릿과 라드 덩어리 그리고 러빙 케어…재닌 안토니㊤

기사입력2024-07-09 00: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매년 2월이면 초콜릿 판매가 급증한다.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발렌타인데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다가오면 가게마다 붉은 포장지로 장식된 달콤한 초콜릿 선물들로 가득 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이 특별한 날에 초콜릿은 단순한 간식 그 이상이 된다. 그러나 이 달콤함의 이면에는 복잡한 감정과 사회적 압력이 숨어 있다. 초콜릿은 즐거움을 주지만, 동시에 체중 증가와 다이어트에 대한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사회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은 날씬한 몸매이며,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체중과 외모에 신경 쓴다.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체중과 외모의 압박은 더 심하다. 발렌타인데이에 주고받는 초콜릿조차도 종종 체중 관리와 외모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사랑과 애정의 상징조차도 사회적 기대와 개인의 욕망에 지배받는 것이다.

바하마 태생의 미국 예술가 재닌 안토니(Janine Antoni)는 1992년에 무게가 272㎏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초콜릿 덩어리를 작품으로 내놓았다. 그냥 초콜릿 덩어리가 아니었던, 모서리가 훼손된 초콜릿 덩어리였다. 그녀는 과연 이 작업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유혹과 지방, 포장과 립스틱=1992년에 재닌 안토니는 미술계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 ‘갉다(Gnaw)’를 선보였다.

구상 조각의 전통에 관심이 깊은 안토니는 조각작업을 하고 싶었다. 예술가로서 전통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접근을 보여주길 원했다. 신체를 조각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신체를 직접 묘사하지 않으려 했고, 조각을 하고 싶었지만, 망치와 정 같은 도구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결정한 것이 입으로 하는 조각이었다. 그녀는 망치와 정 대신 입을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신체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신체의 흔적과 남겨진 잔여물로 신체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입으로 조각을 할 수 있을까? 입에는 치아가 있고, 치아는 어찌 보면 무엇인가를 갉기에 적합한 도구다. 그렇다면 무엇을 갉아야 할까? 조각의 전통적 재료인 돌? 나무? 대리석? 혹은 철? 아니면 개그맨 박준형이 ‘갈갈이’라는 이름으로 절반 잘린 무 속을 이로 파냈던 것처럼 무를 갉아야 할까?

재닌 안토니, ‘갉다’, 1992. 작가가 이로 갉은 초콜릿과 화이트 라드 덩어리, 각 272㎏ 그리고 라드 잔여물에 색소와 왁스를 혼합해 만든 립스틱. <출처=www.janineantoni.net>

안토니는 무는 아니었지만, 먹는 것과 연관된 재료를 떠올렸다. 그녀는 먹는 행위와 같은 일상적인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입으로 조각을 한다면 가장 적합한 재료는 초콜릿이라고 생각했다. 초콜릿은 욕망을 드러내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소비주의와 상업주의를 이끄는 욕망. 언뜻 미니멀해 보이는 안토니의 ‘갉다’는 이렇게 탄생했다.

‘갉다’는 안토니의 구상 조각의 전통을 잇듯이 대리석 단 위에 육면체 형태로 놓여 있었다. 272㎏의 거대한 초콜릿 육면체의 모서리에는 이로 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뿔싸! 그런데 거대한 육면체가 하나 더 있다. 다른 하나도 초콜릿 덩어리일까? 이 덩어리는 노란 색이 약간 감도는 우윳빛이다. 화이트초콜릿일까? 아니다, 라드다. 바로 돼지기름이다. 그녀는 초콜릿이 불러온 욕망에 굴복하면 남는 것은 지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번째 육면체를 돼지기름으로 만들었다. 이 라드 육면체 또한 모서리가 갉아져 있으며, 지방 덩어리라서 전시가 진행됨에 따라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 두 덩어리의 형태를 보면 미니멀리즘이 떠오른다. 로버트 모리스나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리즘 육면체가 연상된다. 그런데 모서리가 갉아져 있다. 훼손된 미니멀리즘 육면체다.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이 남성 작가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그녀의 ‘갉다’는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운동을 떠올리게 하며 훼손을 통해 남성 주도의 미술문화의 변형을 가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거대한 초콜릿 덩어리와 라드 덩어리를 먹었을까? 모서리를 이로 갉아낸 것은 사실이지만, 먹지는 않았다. 혹시 작가가 이 거대한 칼로리 덩어리 때문에 살이 찔까 걱정되어 먹지 않은 것일까? 다음 전시실로 시선을 옮기면, 이로 갉아낸 초콜릿과 라드의 행방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초콜릿을 한 달 반 동안 갉아낸 후, 이를 뱉어 모아서 녹여 45개의 하트 모양 초콜릿 포장재로 재탄생시켰다. 라드 잔여물도 마찬가지로 색소와 왁스를 혼합해 400개의 립스틱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초콜릿 포장재들과 립스틱들을 마치 백화점에서 제품을 디스플레이하듯이 유리 진열장에 전시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포장이 물건 자체보다 더 중요한 시대적 현상, 즉 본질보다 외형에 집중하는 사회적 경향을 풍자했다. 물건 자체보다 포장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상업주의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수많은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들의 자존감을 파괴하는 원인물질(지방)을 씹고 뱉어내어 립스틱같이 겉모습을 치장하는 제품이 되는 이 작업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회의 욕망이 지닌 아이러니한 구조를 느끼게 된다. (계속,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