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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당신 안의 상처는 지금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내 두려움을 예술로 길들인다…루이즈 부르주아 회고전

기사입력2025-11-24 09:12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루이즈 부르주아가 다시 한국을 찾았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에서 오는 2026년 1월 4일까지 열리는 회고전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Louise Bourgeois: The Evanescent and the Eternal)’은 한국에서는 25년 만에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다.

회화, 조각, 설치 등 106점에 이르는 작품이 총망라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전 생애를 가로지르며, 의식과 무의식, 사라지는 것과 영원한 것이라는 양극의 시간 속에서 인간 존재의 흔들림을 탐구한다.

트라우마의 기억에서 태어난 예술

루이즈 부르주아, ‘아버지의 파괴’, 1974~2017, 보존용 폴리우레탄 수지, 목재, 천, 붉은 조명, 237.8×362.3×248.6cm, 글렌스톤 미술관 소장, 포토맥, 메릴랜드, 미국, 사진:크리스토퍼 버크,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SACK, Korea.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나 2010년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예술은 철저히 ‘자전적’이다. 태피스트리 복원 작업장을 운영하던 부모 아래서 자란 부르주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하고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오이디푸스 시기에 나는 결코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회상했듯, 가족 구조 속 결핍과 긴장은 평생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었다.

그의 조각에는 항상 부재, 분리, 봉합, 재결합이 함께 존재했다. ‘아버지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Father, 1974)’에서 작가는 억눌렀던 분노를 폭발시켰고, ‘개화하는 야누스(Janus Fleuri, 1968)’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형상을 뒤섞어 정체성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1990년대 대표작 ‘붉은 방(부모)’[Red Room(Parents)]’과 ‘밀실(검은 날들)[Cell(Black Days)]’은 억압된 기억과 성적 긴장을 공간적으로 시각화한 결정적 작업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단순히 상처의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부르주아에게 조각은 심리적 구조의 시각화이며, ‘살아 있는 감정의 형태학’이었다. 목재를 깎고, 천을 이어 붙이고, 철을 구부리는 노동의 반복 속에서 그는 상처를 끊임없이 재구성했다.

“바느질, 묶기, 이어붙이기는 나에게 치유의 행위였다.” 그의 천작업은 그런 점에서 내면의 공포를 꿰매는 제의적 행위의 결과다.

루이즈 부르주아, ‘커플’, 2003, 알루미늄, 365.1×200×109.9cm, 개인소장, 뉴욕, 사진:조너선 라이언후브우드,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SACK, Korea.

호암미술관 전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 구조로 구성되었다. 1층은 이성과 질서를 상징하는 밝은 공간으로 작가의 초창기 회화와 조각을 배치했고, 2층은 어둡고 밀도 높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꾸며져 있다. 관람자는 작품들 사이를 오가며 부르주아의 정신세계 속을 직접 탐험하듯 이동하게 된다. 전시장 곳곳에는 작가가 남긴 불어와 영어 원문 일기, 정신분석 기록이 한국어 번역과 함께 제시되어, 그녀의 내면 독백을 따라갈 수 있도록 연출됐다.

흥미로운 점은 동시대 개념미술 작가 제니 홀저(Jenny Holzer)가 참여해 부르주아의 텍스트를 전시장 벽면과 셔틀버스 외부에 프로젝션 형태로 투사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두려움을 예술로 길들인다’와 같은 부르주아의 문장이 빛으로 공간을 채우며, 작가의 내면 서사가 현실 공간 속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30여 년간 정신분석을 받으며 꿈과 기억을 기록했고, 그 기록은 미술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나의 작품은 감정의 문서다”라는 그의 말은 예술이 단순한 조형 행위가 아니라 자아를 재건하는 심리적 서사임을 보여준다.

전시 공간에 펼쳐진 부르주아의 세계는, 덧없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빛처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 안의 상처는 지금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가.” 중기이코노미 김현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