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작업을 더 풍부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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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삶 그리고 작업을 더 풍부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 고정되지 않은 것, 흘러가는 것, 끊임없이 변하는 것…미술 글 쓰기

기사입력2025-01-06 17:15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어릴 때부터 나는 모든 것에 답이 있다고 믿어왔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해답지를 보고 거꾸로 찾아가 보라는 교육관이 익숙했고,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왕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해답이 없는 문제는 내게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답이 없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고, 내가 살고 있던 세계에서는 모든 것에 늘 정해진 기준과 절차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뭔가를 직접 시도하기 전에 늘 “어떻게 하면 되나요?”라는 질문부터 던졌다. 방법을 알면 늘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것이 내가 살아온 세계의 정확한 법칙이었다.

하지만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며 풀어야 할 문제가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창의적인 일’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더 이상 나에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장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잘 해내야 하는 일에 갈피를 못 잡다니. 부끄러웠다. 단순한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서 더 나아가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자유 역시 어쩌면 누리기 위한 연습이 필요했던 거 같다. 생각해보면 미술학교의 수업도 분명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있었지만, 결코 정답을 내놓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과정을 공유하는 시간에 가까웠고, 누군가는 이 과정에서 성큼성큼 빨리도 멀리 나아갔다. 그 시기의 나는 고장 난 시계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창작을 경험한 사람이면 모두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한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정답이 없어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매주 자기를 소개하거나 자기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매주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는게 아니라 이전 주차에 썼던 글을 고쳐가야 했다. 그리고 고친 글을 모두와 함께 읽었다. 처음엔 모두가 신이 나서 글을 써왔지만, 한주 한주 지나며 수업을 나오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다. 어느 하루는 선생님과 단둘이서 강의실에 앉아 있기도 했다. 매주 조금씩 달라지는 글을 읽다 보면 갈피를 잡지 못하거나 그런 상태에 놓여 있다가 나름의 방식으로 뭔가를 찾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기도 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수업의 후반부. 모두의 글에 익숙해졌을 때, 인물화를 그리던 친구의 글을 읽게 되었다. 글에 대한 솔직한 첫인상은 ‘이게 작가가 자기 작품을 설명하는 글이라고?’였다. 작품을 보여주는 가장 최선의 글쓰기가 있다고 믿었고, 대체로 글은 정확한 단어들로 논리적으로 구성되어야 했었는데, 그 애의 글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사람을 그리는지, 왜 그림을 선택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 글에는 내가 알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던 내용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 사람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정답이 아닌 글이라고 생각했고 쓸모가 없을 거로 생각했다. 이전의 내가 그러했듯.

하지만 글을 읽을수록 그림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글에는 그림을 그린 이유도, 그림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목표도 담겨 있지 않았다. 대신, 인물의 성격과 버릇, 습관 같은 세밀한 특징들, 그가 좋아한 꽃과 색, 함께한 기억들이 적혀 있었다. 그림을 그리며 인물에 대해 깊이 생각한 흔적들이 글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고, 그림에 스민 색조 역시 그 인물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도 목표도 없이 써 내려간 듯한 그 글이, 오히려 가장 완벽한 정답에 가까운 글처럼 다가왔다.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내가 알고 있던 ‘좋은 글’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목적이나 논리적 서술이 부족한 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 글이 불러일으킨 생생한 감각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정확하지 않고 모호하기에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미지와 문장이 있었다. 정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친구가 그린 그림에 가장 잘 어울리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미리 정해진 답이 아니라, 발견된 것에 가까웠다.

그림, 조각, 영상. 미술에서 사용하는 매체는 저마다의 특성이 뚜렷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말을 고르는 일부터 작가의 선택이 된다. 나는 주로 영상을 다루기에 대체로 흘러가는 시간 동안 사람들이 무엇을 보게 되는지 마치 예언처럼 쓰곤 했지만, 그 시기의 수업 이후 나의 글도 서서히 변해갔다. 작품을 만들고 난 뒤 설명할 때, 단순한 정보의 나열보다도 내가 느낀 것, 작품을 대하면서 떠오른 생각과 감정들을 더 많이 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또한, 영상을 보는 사람이 무엇을 궁금해하고 무엇을 느끼면 좋을지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정답이 없는 미술작업을 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미술에 관한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다. 무언가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단단히 고정하는 일이 더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아주 꼭 맞지 않더라도 삶을, 작업을 더 풍부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고정되지 않은 것, 흘러가는 것,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더 넓게 껴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로소 삶과 작업 그리고 내가 마음 쓴 것들을 껴안을 수 있을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