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간을 만들까…해볼 만한, 지금 아니면 못할 일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왜 공간을 만들까…해볼 만한, 지금 아니면 못할 일 벽 뒤에 감추어진 것…피코 개관 준비전 ‘6 Murals(여섯 벽화)’

기사입력2025-06-11 17:05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전시를 하기 위해서 공간이 필요하다. 이는 지나치게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문제를 만들어내는 요인이다. 특정한 공간을 소유하고, 그것을 전시공간으로 개방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자, 자격의 문제로 번지게 된다. 공간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이들은 누가 전시를 할 수 있거나 없는지 결정할 수 있다. 나아가, 누가 미술가가 될 수 있으며 될 수 없는지 결정할 수 있다.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는 작가가 직접 운영하고 관리하는 공간을 뜻한다.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자격을 부여하는 주체의 존재를 거부하고 대안적 행동이 가능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실천의 양식이기도 하다. 이런 종류의 대안적 공간은 DIY(Do-It-Yourself) 미학이나 ‘자기 조직화’ 실천과 연관되기도 한다. 미술가인 바나비 드래블(Barnaby Drabble)은 저서 ‘스스로 조직하기(Self-Organised)’(2013)에 수록된 글에서, ‘자기 조직화’ 실천이 독립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독립체와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 적 있다.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를 만드는 것 역시 이처럼 독립체를 만드는 자기 조직적 행위, 대안적 공간을 만드는 행위에 해당할 테다.

하지만 ‘대안공간’이라는 말은 낯설기보다 익숙하고, 새롭기보다 진부하다. 연구자 고동연은 국내에서 1990년대 후반 등장한 ‘1세대 대안공간’과 2000년대 중반 나타난 ‘2세대 대안공간’을 분석한 바 있다. 이러한 대안공간은 제도 비판적 성격을 갖는 잡지를 발간하거나, ‘화이트큐브’의 전형적이고 매끈한 공간성을 벗어나거나, 대관료를 받지 않고 비영리적으로 운영하는 등, 탈제도적 형태의 자기 조직적 실천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재정적 안정성이 떨어지고,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으로 공간 운영이 불투명해지는 등, 대안공간의 운영은 점차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안공간 역시 영리적 운영을 선택하거나 국공립 기관의 기금 수혜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수혜를 받지 못하는 소규모 대안공간과 받을 수 있었던 대안공간 사이에 또 다른 위계를 만들게 되었다. 자기 조직적이고 대안적인 실천 역시 자격 부여의 권력을 작동시키는 주체로 포섭된 것이다.

피코 개관 준비전 ‘6 Murals(여섯 벽화)’ 전경. 촬영=고정균.

대안공간과 같은 오래전 이야기를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지난 3월 문을 연 전시공간 피코(PCO)를 찾아 개관 준비전 ‘6 Murals(여섯 벽화)’(2025)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피코는 고근호, 박예림, 박정우, 이재환, 이환희, 최윤희 등 6명의 미술가가 공동 설립한 공간이었고, ‘6 Murals(여섯 벽화)’는 그 6명의 미술가가 직접 참여한 전시였다. 전시에서, 작가들은 아직 가벽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공간의 벽 위에 나름의 방법론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제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나 대안공간을 직접 열고 운영하는 일은 온전히 혁신적이라거나 독립적인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기 조직적 실천을 볼 때, 그 독립성이 아니라 포섭과의 아슬아슬한 긴장관계에 더 주목하게 된다. 대안공간의 지난 역사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6 Murals(여섯 벽화)’를 보며, 공간을 열고 운영하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6 Murals(여섯 벽화)’이 개관전이 아니라 ‘개관 준비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전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 준비 중인 취약한 상태를 드러냈고, 그러한 상태를 그림의 무대로 삼았다. 이론가 로런 벌랜트(Lauren Berlant)는 이처럼 완성되지 않은 상태, 무언가가 시작되지 않은 답보 상태(impasse)로부터, 미완성이나 부족함으로 인한 희망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삶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전통적 토대가 빠르고 위협적인 속도로 무너지고 부서지는 상황에서, 미완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대안적 공간을 조직하는 일이 그 자체로 혁신적이거나 놀라운 일이 되기 어렵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최소한 답보 상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벌랜트의 표현을 따르면 ‘희망’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6 Murals(여섯 벽화)’에 그려진 벽화는 그러한 답보 상태에서 작가이자 공간 운영자인 6명의 주체가 얼마나 서로 다른, 다르기에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6 Murals(여섯 벽화)’이 끝난 뒤 피코는 공사를 마무리했을 것이고, 그려진 벽화는 가벽에 덮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은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다가, 언젠가 공간이 문을 닫고 가벽을 뜯어낼 때 다시 보여질 것이었다. 전시를 설명하는 서문에서, ‘6 Murals(여섯 벽화)’를 여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 “한번 해볼 만한 일”이자 “지금이 아니면 못 할 일”이라고 말이다. 왜 공간을 만들까? 해볼 만한 일이자, 지금이 아니면 못 할 일이기 때문이다. 답보 상태의 희망은 피코의 벽 뒤에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기에 더욱 효과적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