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또 다른 ‘연결과 도약’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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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언젠가 또 다른 ‘연결과 도약’으로 이어지기를 ‘손 자리’…한 시기의 전환을 현재의 시선에서 탐색하는 과정

기사입력2025-10-20 10:46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새 작업을 위한 리서치를 진행하던 중에 미스터리한 사물을 보았다. 담당 큐레이터의 배려로 조사하고 있던 자료와 연관된 여러 물건을 수장고에서 꺼내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화려한 물건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물을 발견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쓰임이 어땠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피(皮)함이었다. 둥글게 자른 가죽을 손바느질로 이어 붙여 모든 면을 가죽으로 덮은 그 물건은 매끄럽거나 귀하게 여겨지는 공예품들과 함께 보관되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벗겨지고 갈라진 흔적이 보였다. 완전무결한 상태가 아닌 것. 매끄럽고 화려한, 온전한 공예품 사이에 놓인 미스터리한 사물. 미스터리라는 단어의 뜻처럼 ‘도저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인상을 띄는 물건이었다.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지 알 수가 없어 소장처로 오기 전 그 물건을 판매한 화랑에도 문의를 해보았다.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다만, 단단하고 질긴 가죽의 특성상 파손되거나 내용물이 젖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귀하게 담아 운반하는 상자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이 외에 과거의 운송수단이던 말의 등허리에 얹어 물건을 운반하던 부담상자(負擔箱子) 등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정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가죽함과의 만남은 남겨진 한 사물로부터 그것이 존재하던 시기까지,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시간을 들여다보고 이를 엇비슷한 시기의 다른 상황과 연결하는 도약의 과정으로 이어졌다. 당시 나는 한국의 ‘근대 공예’에 관한 리서치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근대’라는 특정한 시기와 ‘공예’라는 장르가 낯설기도 했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작자미상의 가죽함을 이 주제와 조사 범위와 엮어내는 일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사전 정보가 많이 없었고,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주제로부터 출발해 새 작업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내 나름의 조사를 이어갔다.

박선호, ‘손 자리’, 2025, 싱글 채널 비디오, 11분 55초, *비디오 스틸 이미지. 우란문화재단 제작 지원.

이 리서치는 학술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기에, 스스로에게 계속 무언가를 이어내 보라는 과제를 주려고 했다. 조사를 진행하며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졌지만, 고민의 시간은 계속 이어졌다. 그럼에도 한동안 들여다보던 여러 자료와 며칠간 눈앞에 아른거리는 피함의 모습을 엮어 영상작업 ‘손 자리(In Transit, 2025)’를 제작하게 되었다.

‘손 자리’는 ‘근대’와 ‘공예’를 열쇳말 삼아 한 시기의 전환을 현재의 시선에서 탐색하는 과정을 담는 영상작업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작업 과정은 짐짓 연관 없어 보이는 과거의 파편을 엮어 한 자료와 다른 자료를 연결해 흐릿하게 남은 잔상을 길어 올리는 방식의 연속이었다.

영상이 담고 있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공예가들이 이름 없는 장인에서 작가로 호명되기 시작한 제도의 기점인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당시 철도의 발명과 더불어 변화한 운송수단이 가져온 산업의 변화와 도시 풍경, 마지막으로 수장고에서 발견한 작자미상의 가죽함이다. 도약의 과정은 대략 이렇다. 수장고 방문 이후, 나는 말 등에 얹어 사물을 나르던 것으로 ‘추정하는’ 가죽함이 과거 급격하게 변화하며 새 시대를 맞이하던 긴장과 변화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가정했다. 이후로 1900년대 초, 산업이 발전하고 철도와 철로가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을 무렵을 아주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고자 당대의 신문 기사나 사진그림엽서 등 자료를 기웃거렸다.

가죽함을 단서로 출발한 조사는 근대를 단일한 흐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여러 변화와 기술적 전환이 겹쳐 나타나는 산발적인 과정으로 바라보게 했다. 전통적인 운송 수단이 쇠퇴하며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 사물, 공예 제도의 정착과 함께 비로소 이름을 얻기 시작한 공예가들, 그리고 무수히 많이 변화를 거친 도시는 모두 같은 시기 안에서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갔다. 나는 이러한 어긋남과 중첩 속에서 근대라는 시대의 복합적인 양상을 보게 되었고, 영상은 사물과 기록, 그리고 정보를 오가며 그 전환기의 성격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이러한 접근은 특정 사물의 쓰임이나 의의를 규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변화를 함께 고려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작업은 과거를 단순히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남겨진 흔적을 통해 근대가 형성되는 과정을 현재의 자리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하려는 시도에 가까워졌다.

무엇도 잘 알지 못한 채 진행한 작업은 나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짐짓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도약과 상상은 단순한 비약이 아닌, 흩어진 시간과 사물을 잇는 다리로서 작업이 스스로 의미를 열어 내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체를 잘 알지 못하는 과거의 것들은 단순히 오래되거나 낯선 것으로 남지 않았다. 그것들은 답을 주지 않으면서도 다른 해석과 관계를 만들어 내는 길잡이가 되었고, 완결로 닫히기보다 서서히 확장되고 이어지는 움직임으로 기능했다.

어쩌면 결론을 이야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남겨진 것들로부터 발견한 희미한 가능성을 따라가며 그 사이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연결을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 낸 연결과 도약이 누군가에게 닿아, 언젠가 또 다른 연결과 도약으로 이어지기를 기다려 본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