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회화가 생생하게 하나가 되는 아름다움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문학과 회화가 생생하게 하나가 되는 아름다움 문학적 영감의 화가…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기사입력2025-10-26 00: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문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미술은 한 순간을 영원 속에 붙들어 놓는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트로이 전쟁을 노래했을 때, 도공들은 그 영웅들을 항아리 위에 새겨 넣었다. 문학과 미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세계를 기록한다.

문학은 미술을 만날 때 더욱 찬란히 빛난다. 중세 필사본의 문자는 그림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문자의 세계를 구축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보티첼리는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천상의 비전을 캔버스 위에 신비롭게 옮겨 놓았다. 시인의 상상력이 화가의 붓끝에서 형태를 얻는 이 신비로운 변환은 예술을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끈다.

19세기 말 영국에서 이러한 예술적 연금술의 대가가 탄생했다. 1849년 로마의 어느 봄날, 영국의 화가 부부 윌리엄과 이사벨라 워터하우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그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문학 속에 잠들어 있던 인물들을 현실로 불러내는 마법사였다.

◇고전적 이상향으로 충만한 회화=워터하우스의 초기 작품에는 빅토리아 시대 고전 주제가 충만하게 울려 퍼진다. 고전적 이상향에 대한 동경, 문학적 서사에 대한 열정, 그리고 기술적 완성도를 추구한 그의 예술적 여정은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1870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조각을 전공했는데, 점차 관습적인 교육과 예술에 환멸을 느꼈다. 그러던 중 유년기에 이탈리아에서 접했던 그리스·로마 신화와 르네상스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삶과 예술의 표현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고, 이후 고대·중세 문학과 신화 연구에 몰두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다.

조각을 전공했던 그를 화가로서 길을 걷게 한 작품은 1874년 선보인 ‘잠과 그의 이복형제 죽음(Sleep and His Half-Brother Death)’이었다. 결핵으로 요절한 두 남동생에 대한 애도를 그리스 신화라는 문학적 소재를 통해 담아냈던 이 작품은, 개인적 슬픔을 보편적 주제로 승화시키는 그의 독특한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샬롯의 여인’, 1888, 캔버스 위에 유채, 183×230cm, 테이트 브리튼 소장, 영국. <출처=위키백과>

1880년대 워터하우스는 사실적이고 탐미적인 묘사로 유명한 고전주의 화가 알마 타데마(Alma-Tadema)와 고전적 균형미와 서정적 분위기를 두루 갖춘 영국의 대표적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프레더릭 레이턴(Frederick Leighton)의 영향 아래 있었다. 당시 큰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두 화가를 추종하는 듯 보이는 이 시기 작품들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관념적이고 도식적이었다. ‘무도회가 끝나고(After the Dance, 1876)’나 ‘디오게네스(Diogenes, 1882)’같은 작품들에서 그의 여성 인물들은 고전적 아름다움의 전형을 보여주었지만, 개성이나 내적 생명력은 부족해 보였다.

워터하우스는 앨프리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 ‘샬롯의 여인’에 영감을 받아 세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1888년 선보인 ‘샬롯의 여인(The Lady of Shalott)’이 그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문학적 소재를 성공적으로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세 점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 속 여인은 여전히 문학 속 이상화된 비극적 인물의 모습이었을 뿐,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이 시기 그의 주된 영감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테니슨의 시 등 고전 문학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구현 방식은 여전히 19세기 아카데미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름답고 품위 있지만, 어딘가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1891년, 마흔두 살의 그는 신비로운 전환점을 맺이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한다. 그는 점차 복잡하고 심리적인 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여성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91년 워터하우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891년 이후, 생생함=1891년, 워터하우스는 ‘오딧세우스에게 잔을 권하는 키르케(Circe Offering the Cup to Odysseus)’를 선보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키르케는 이전과는 다른 생동감과 개성이 넘쳐났다. 마치 실제 살아있는 여성의 숨결이 캔버스를 통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 해에 무엇이 그의 예술적 생애에 변곡점을 만들어 냈을까? 1891년 이후 주요 작품들에는 놀랍도록 일관된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미술사학자들은 이 시기 그가 새로운 모델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여성이 누구였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 신비로운 만남이 그의 회화를 변화시켰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힐라스와 님프’, 1896, 캔버스 위에 유채, 132.1×197.5cm. 맨처스터 미술관 소장, 영국. <출처=위키백과>

‘힐라스와 님프(Hylas and the Nymphs, 1896)’의 요정들, ‘무정한 미녀(La Belle Dame sans Merci, 1893)’의 미녀, ‘미란다(Miranda, 1916)’의 순수한 소녀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성격이 다른 여성들이 유사한 얼굴 구조와 눈매, 입술 선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동일 인물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작품마다 달라지는 표정과 감정을 드러내는 놀라운 변주로 구현되었다.

1894년 두 번째 ‘샬롯의 여인’ 작품 ‘랜슬롯을 바라보는 샬롯의 여인(The Lady of Shalott Looking at Lancelot)’을 보면 이 변화가 얼마나 극적인지 알 수 있다. 1888년 첫 번째 작품의 샬롯의 여인이 고전적 비극의 전형이었다면, 1894년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같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1894년의 여인은 훨씬 더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운명에 맞서는 의지와 사랑에 대한 갈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기법적인 변화 역시 뚜렷하게 나타났다. 색채는 더욱 풍부해졌고, 붓 터치는 더욱 자유로워졌으며, 무엇보다 인물의 눈빛에서는 살아 숨 쉬는 듯한 감정이 읽힌다. 1891년 이전의 여성들이 그저 먼 곳을 응시했다면, 이후의 여성들은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문학적 영감의 폭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테니슨의 시에서 출발한 워터하우스는 셰익스피어, 키츠, 심지어 그리스 신화의 소소한 에피소드들까지 폭넓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세 점의 ‘오필리아(Ophelia)‘’연작(1889~1910)에서 그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무대 밖에서만 전해지는 오필리아의 죽음을 시각화함으로써, 문학에서 회화로의 전환이 새로운 서사 창출의 방식임을 보여줬다.

특히 1891년 이후 그의 회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성씨 ‘Waterhouse’와도 연결되는 이 모티프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샬롯의 여인은 배를 타고 강을 떠내려가고, 오필리아는 물에 빠져 죽으며, 님프들은 물속에 살고,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혹된다. 물은 워터하우스에게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경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예술가에게 영감이 어떻게 찾아오고, 그 영감이 어떻게 작품을 통해 영원성을 얻는가? 워터하우스의 작업은 이 질문에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의 문학과 신화에 대한 깊은 애정, 1891년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물’이라는 상징적 장치. 워터하우스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문학과 회화가 생생하게 하나가 되는 아름다움을 만나게 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