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소각 원칙 세워야 주주가 보호받는다

프린트

오피니언 ㅣ 기자수첩 ‘자사주’ 소각 원칙 세워야 주주가 보호받는다 법원 판결로 불붙은 논란…‘자사주의 마법’은 이제 끝내야

기사입력2025-10-24 08:48

채민선 기자 (iscra79@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자사주의 마법’이라는 말이 다시 나왔다.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9월 10일 태광산업의 자사주(회사가 보유한 자기주식)를 담보로 한 교환사채(EB) 발행을 막아달라는 자산운용사의 요청을 모두 기각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이사회가 내린 경영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지만, 시장에서는 “자사주를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쓰도록 사실상 허용한 결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태광산업은 지난 6월 이사회에서 보유 중인 자사주 전량, 즉 발행주식의 24.4%를 담보로 약 3185억 원 규모의 교환사채를 발행하기로 했다. 문제는 이 회사가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자사주 처분 계획이 없다”고 공시했다는 점이다. 그러다 돌연 계획을 바꾼 이유가, 그룹 계열사이자 오너 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투자회사 T2PE를 지원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T2PE는 태광산업과 계열사 티시스가 각각 41%를 갖고 있고, 이호진 전 회장의 자녀들도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다. 즉, 자사주가 오너 일가의 투자회사를 도와주는 수단으로 쓰인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그럼에도 법원은 “이사회의 충실의무 위반은 아니다”라며 태광산업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판단이 자사주 제도의 취지를 훼손한다는 지적이다. 자사주는 원래 회사가 남는 자금을 활용해 주식을 사들인 뒤 소각하거나, 임직원 보상이나 주주환원에 쓰도록 만든 제도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오너가 지배권을 유지하거나, 회사 자금을 우회 지원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

법원의 이번 결정이 나오자, 다른 기업들도 잇따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시장에서는 “국회에서 규제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발행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정치권과 금융당국도 제도 손질에 나섰다. 여당은 최근 기업의 자사주 매입을 회계상 ‘자산 거래’가 아니라 ‘자본 거래’로 명확히 규정하는 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자사주를 단순한 투자수단이 아닌 자본관리 수단으로 보고, 원칙적으로 소각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금융위원회도 지난 9월 26일 자사주 공시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자본시장법 시행령 및 규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상장사가 자사주를 1% 이상 보유하면 반드시 공시해야 하고, 공시 주기도 기존 연 1회에서 2회로 늘어난다. 또 자사주 취득 목적과 실제 처분 계획을 구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왜 사고, 언제 팔고, 어디에 쓸 것인지”를 미리 밝히라는 취지다.

이런 변화들은 모두 자사주를 투명하게 관리하고, 주주가치를 지키기 위한 방향이다. 하지만 공시 강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사주를 이용해 지배력을 강화하거나 사익을 챙기는 행태를 막으려면,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소각’해야 한다는 원칙을 법에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자사주는 본래 주주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수단이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지배주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법원 결정은 상법 개정의 취지를 외면한 잘못된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자사주를 기초로 한 교환사채 발행은 제한하거나 금지해야 하며,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소각하도록 제도를 빨리 정비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버크셔 해서웨이 등 주요 기업들이 자사주를 적극 매입한 뒤 대부분을 즉시 소각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애플은 2012년 이후 1000조 원이 넘는 자사주를 매입해 주당가치를 높였고, 마이크로소프트와 메타 역시 수백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하며 주주환원 정책을 강화했다. 미국 기업들은 자사주를 지배권 방어가 아닌 주주환원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