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는 순간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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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는 순간이 아깝지 않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감각의 귀환’ ‘순수한 기쁨’

기사입력2025-11-12 16:12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최근에 퇴직금을 모아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장만했다. 전혀 계획에 없었던 소비였는데, 이후부터 사진을 찍는 일이 매우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순수한 기쁨. 사진을 찍을 때 느낀 감정이었다. 한 손에 꼭 들어오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주위를 잊고 내가 느끼는 것들에 집중하게 된다. 예컨대 매일 다니는 장소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고 볼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를 화두로 한 이야깃거리가 생긴다는게 또 다른 즐거움이다. 빠른 걸음으로 걷고 효율만을 추구하던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는 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카메라를 유난스러운 장치처럼 여겼었다. 과거, 사진기를 들지 않고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문화가 생겨날 즈음부터 무엇을 찍었나 보다 타인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사진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욕망을 알게 하는 창문이 되었고, 그렇게 사진을 찍는 일이 시시해졌던 것 같다.

새 사진기를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꽤 오랜 기간 구상한 새 작업 한 편을 촬영해야 했다. 매우 단순한 방식의 영상이었는데, 무엇을 찍으면 좋을지 좀처럼 결정할 수 없었다. 콘셉트는 필름 한 롤 분량에 담을 정물을 선택하고 한 테이크로 완결짓는 것. 허나, 원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과정 자체가 큰 과제처럼 느껴졌다. 촬영을 준비할 때마다 엄습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필름은 실수를 용납하기 어려운 매체다. 필름에 새겨진 영상은 현상하기 전까지 볼 수 없고, 현상 이후 촬영에 실패했다는 걸 알게 되면 긴 시간 그 작업을 준비한 과정이 무용지물이 된다.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걱정하다보니 아무 것도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매번 이렇게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었던가? 그렇지만, 마음속의 마감기한이 있었기에 어렵게 콘셉트를 정리하고, 촬영할 정물을 고르고, 생각한 장면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하기 위해 여러 번의 실험과 리허설을 진행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촬영 전날 잠을 설쳤다.

<사진=박선호>

촬영날 오후 스튜디오로 향하며 몇 가지 다짐을 했다. 현장에서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 것. 결과를 미리 예측하거나 생각하지 말 것. 그리고 촬영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의를 둘 것.

생각을 정리하고 숨을 고른 이후 탁자 위에 소품으로 골라 온 천을 깔고 백색 도자기 접시를 두었다. 그 위에 포도 껍질과 체리 꼭지 그리고 포크를 올려둔 뒤 옆쪽에 작은 유리컵을 두고 와인을 따랐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물건들을 아주 조금씩 움직여보며 조명을 세울 위치를 정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필름을 넣고 다시 심호흡.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얹었다. 트리거를 누를 때 실수하지 않으려 카메라를 살피다가 실수로 트리거를 너무 세게 눌러버렸다. 2초 정도.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셔터가 돌아갔고,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했다.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새 필름을 장착했다. 아주 침착하게. 필름을 교체한 뒤 나는 촬영 준비를 마쳤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는 유리잔을 테이블 위로 쓰러뜨리라는 요청이었다.

유리잔이 넘어지기 직전, 손가락에 힘을 빼고 셔터를 반 정도 누르고 있었다. 작은 손이 불쑥 등장하며 컵 속에 담긴 와인이 출렁이기 시작하는 장면을 뷰파인더를 통해 보았다. 순간 모두가 숨을 죽이고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다는게 느껴지며 시간이 일순간 멈추는 듯했다. 와인이 유리잔과 함께 기울어지며 바닥에 깔린 천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을 양 눈으로 주시했다. 왼쪽 눈은 뷰파인더에, 오른쪽 눈은 뷰파인더 너머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카메라에 장착된 필름이 감기며 움직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터가 돌아가며 양 손에 미세한 진동이 전달됐다. 필름 한 롤이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가는 데는 약 3분 정도가 흘렀다.

촬영이 끝났을 때, 긴장과 이완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것 역시 순수한 기쁨이었다. 이 짧은 순간을 겪으며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감각의 귀환’ 이 내 삶에 절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이지 않은 이 시간이 나에게 현존의 감각을 일깨웠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