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다듬으며, 그 속에 새겨진 시간을 되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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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글을 다듬으며, 그 속에 새겨진 시간을 되새기다 “글과 미술…특정한 형식에 생각을 담아내는 과정”

기사입력2025-02-11 08:55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작년부터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고치고 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글의 기획 단계부터 마무리하는 여정을 지켜보고 있다(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문장으로 분명하게 쓰여 있지만 의미가 통하지 않는 부분을 콕 집어 질문하거나 글의 구성상 불필요해 보이는 뚱뚱한 문장의 일부를 저며 본문에서 덜어낸다.

재확인이 필요한 부분에는 형광펜 칠을 한 뒤 메모를 달아서 전송하고 답변을 기다린다. 필자들에게 ‘조금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질문을 건넨다. 사전을 찾아보고 보고 또 봐도 틀린 부분이 보이는 원고 파일을 끝없이 훑어본다. 시간을 쪼개 틈틈이 우리말 공부도 한다. 이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특정한 형식에 생각을 담아내는 과정이 왠지 모르게 미술작품 만들기와도 다르지 않다고 느껴서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내가 이런 종류의 일을 할 운명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글 쓰는 일이 어려운 만큼 글을 여러 번 읽으며 다듬는 일도 어렵다. 내가 다루는 글이 대체로 예술과 관련이 있기에 어디까지를 예술적으로 허용할 수 있나 고민되는 게 첫 번째 이유고, ‘고친다’라는 말이 주는 꼿꼿한 인상과 꼬장꼬장한 권위를 중화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쓰인다는 게 또 다른 이유다. 다행히 아직 이 과정에서 필자들과 심한 언쟁을 벌인 적은 없고, 대체로 여러 번의 상의를 거쳐 작업을 마쳤다. 그저 속도가 안 나서 집에 와서도 글을 하염없이 본다는 게 문제다. 그렇지만 교정이나 수정 제안이 언제나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라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글에도 저마다 더 어울리는 맛이 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은 읽는 이에게 필연적으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글 쓴 사람의 마음에 가닿고 싶어도 그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고, 계획과 우연이 얽힌 그를 글을 똑 닮게 베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보다 보면 특정 부분에서 이 단어를 콕 찝어 쓴 이유를 생각하게 되고…, 그 만의 단어장에 어떤 단어들이 있는지 목록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그가 소중하게 여긴 것처럼 보이는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하자고 (감히) 제안해 보기도 한다. 어쩌면 그가 글을 쓴 시간만큼 나 역시 그 글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되고…, 글이 길을 잃은 듯한 대목에서는 슬쩍 조언을 건네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정답은 없지만 글 쓴 사람과 글을 번갈아서 생각하다 보면 그냥 더 좋은 방향을 제안할 수 있게 된다. 그냥 그런 거 같다. 누군가는 글쓴이가 글과 관련해서는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말이다.

내 것이 아니기에 더 나은 글을 위해 윤색할 수 있다. 몇 벌의 글이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로웠고, 그 결과 역시 퍽 마음에 들었다. 내가 쓴 글은 어떨까? 다른 사람의 글을 편집하며 내 이전 글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에 쓴 글은 부족하고 모난 부분이 보이긴 했지만, 그 글을 쓰며 보낸 시간과 아직 충분히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2016년에 웹사이트에 저장하고 발행했던 글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2019년의 내가 덧붙인 메모가 남아 있었다. 2016년의 내가 잘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하게 포착한 감각을 3년 뒤의 내가 다시 들여다보고 해석해 낸 거다. 과거의 나를 또 다른 과거의 내가 발견해 준 셈이다. 내가 만든 작업에 관해 쓴 글에, 두 시기의 내가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이. 이따금 아주 사소하게 되찾는 이런 경험이 분에 넘치게 아름답다고 느낀다.

가끔은 글을 읽고 다듬는 데 쓰는 시간과 마음의 방향을 나 자신에게로 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간이 없어, 내 시간을 나를 위해서만 쓸 수 있다면 좋겠어’라고 툴툴대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담긴 생기와 열정을 타인을 위해서 쓰는 일이 때로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어느 순간 흘려보낸 생각이나 감각을 미래의 내가 건져내 주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일은 글과 생각뿐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도 이는 되풀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작은 책상 위에 쌓인 종이 뭉텅이를 톺아보며 그 속에 새겨진 시간을 조용히 되새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