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속에 존재하는 속도, 속도 속에 존재하는 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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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멈춤 속에 존재하는 속도, 속도 속에 존재하는 멈춤 차창 너머의 멈춘 시간…이수린의 개인전 ‘Timeless Train’

기사입력2023-05-03 10:02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기차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1948)에 등장하는 유명한 첫 문장이다. 문장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눈의 고장”, 비일상의 공간으로 경계를 넘는 한순간을 아름답게 짚는다. 국경을 지나고, 터널을 넘으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닥쳐온다. 나는 이 문장이 기차 여행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여행 중 피곤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생경한 풍경이 펼쳐지는 찰나가 떠올랐다.

이수린, ‘2월 28일’, oil on wall, 15×283cm, 2023(위). 아래는 이수린 개인전 ‘Timeless Train’(2023)의 전경 사진.

널리 알려졌듯, 기차의 빠른 속도는 현대성을 상징한다. 차량에 몸을 맡기고 차창을 바라볼 때, 순식간에 늘어지기 시작하는 파노라마적 풍경. 그것은 고전적인 풍경, 예컨대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하나의 소실점을 바라보는 원근법적 풍경과 전혀 다른 무엇으로 여겨졌다. 기차의 격렬한 속도는 멈추어 있는 세상을 움직인다. 움직이다 못해, 이윽고 사라지게 만든다. 이와 같은 사라짐,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으로 녹아내리는’ 휘발성의 경험은,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말했듯, 현대적 생활 그 자체와 다름없었다.

기차 이야기를 꺼낸 건, 지난 3월 이수린의 개인전 ‘Timeless Train’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기차에서 본 것 같은 풍경, 속도가 너무 빨라 꼭 멈춘 것처럼 보이는 역설적 풍경을 전시장 벽 위에 그렸다. 자연스레 그림은 기차처럼 길어졌고, 붓질 역시 길게 늘어지면서 공간의 내부를 가로질렀다. 붓자국은 덧그려진 흔적이 거의 없게 단숨에 그려졌고, 정지된 그림에 속도감을 불어넣었다.

이수린은 직접 쓴 전시 서문을 통해 기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묘사했다. 손에 닿을 듯하다가 이내 스쳐 지나가는, 멀리 머물러 있는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가까이 오는, 빠른 속도 안에서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하나로 녹아내리는. 그림은 세계를 사각형 캔버스 안에 잘라 넣고 정지시키는 사물이다. 모든 것이 그림 안에서 완전히 멈추어 선다. 작가는 캔버스를 떠나, 전시장 벽 위에 넘쳐흐르는 빠른 속도를 욱여넣었다. 그것은 완전히 녹아내리지도, 완전히 응고하지도 않은 어떤 형상, 모순적인 풍경처럼 보였다.

이수린, ‘하이쿠’, oil on panel, 27.5×66cm, 2021

전시된 작업 중에는 ‘하이쿠’라는 제목이 붙은 연작이 있었다. 하이쿠란 일정한 음절 구조를 맞춘 일본의 운문 형식을 뜻한다. 짧고, 종종 즉흥적이며,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대중적 형식이다. 이수린의 ‘하이쿠’는 짧은 운문의 즉흥성이 품는 들뜬 속도를 공유했고, 세 개의 같은 크기 캔버스가 하나의 작업을 이루며 운율을 만들었다. 다만, 여기서 돋보였던 건, 호흡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연결이 아니라 호흡이 뚝 끊기는 단절이었다. 들뜨고 빠른 붓질로 그려진 추상적 그림 사이, 정적으로 묘사된 멈춘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여기서 하이쿠란,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시간을 하나로 아우르기 위한 방법이었다. 즉흥과 계획, 흐름과 응고,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리듬을 만들며 병렬되었다.

전시의 제목인 ‘Timeless Train’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기차’ 정도의 뜻이 될 것 같다. 빠른 속도의 기차 위에 올라탔을 때, 풍경은 정말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사라짐 그 자체를 풍경으로 받아들인다. 또, 사라짐 속에서 순간적으로 정지한 찰나를 잡아채기도 한다. 시간과 인간의 상호 작용에서, 완전하게 녹아 사라지는 속도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은 흥미로운 질문을 만든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휘발성, 그 현대적 감각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하기는 했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림은 세계를 멈추는 사물, 휘발성과 유동성조차 정지시킨 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그런 이상한 사물이다. 이런 이상한 사물을 다루며, 이수린은 멈춤 속에 존재하는 속도, 그리고 속도 속에 존재하는 멈춤을 보여준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며, 어긋나고 삐뚜름한 것을 하나로 포갠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