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는 매끄러움은 타자를 맞이할 공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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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상처 없는 매끄러움은 타자를 맞이할 공간이 없다 상처를 입을 때까지 보기…홍자영 작가

기사입력2023-06-07 09:43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우리 시대의 미(美)를 특징짓는 요소가 매끄러움이라고 말한다. 부푼 풍선을 닮은 제프 쿤스의 조각부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을 차지한 사물은 전부 매끄러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매끄러운 아름다움은 즉각적인 향락을 준다. 그것은 위생적이며 청결하고 긍정적이다. 그리고 온전하게 닫혀 있으며, 조금의 균열도 없다.

다만, 어떠한 균열도 없는 매끄러움은 위험한 것이 된다. 상처가 없다는 것은 곧 타자를 맞이할 공간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비교되는 것으로 숭고가 있다. 일반적으로 숭고란 자연에 존재하는 거대한 사물에 의해 야기되는 경악을 가리킨다. 경악은 주체에게 공포를 준다. 숭고는 개인에게 흠집을 내고 상처를 안긴다. 상처 입은 주체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이 고통스러운 자각과 함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이 열린다. 그러나 매끄러운 아름다움은 주체를 ‘나’ 안에 가두고, 타자를 삭제한다. 타자 없는 ‘나’는 위험하다. 아름다움은 잃어버린 상처를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다시 상처 입을 수 있을까? 우리 주변엔 매끄러운 것들밖에 없다. 거대하거나 더럽거나 날카로운 것이 없다.

‘석굴사원’, 왁스, 모래, 46.5×26.7×10㎝, 2022(사진 왼쪽). ‘기암괴석’, 낙엽송 합판, 미송 목봉. 100×90×32㎝, 2022(사진 오른쪽).

한 전시에 놓인 홍자영 작가의 조각을 보았다. 석굴이나 호수 등이 디오라마처럼 축소된 듯 보이는 흥미로운 조각이었다. 작가는 풍경화나 정원처럼 자연물을 모사하는 오래된 방법을 빌어 조각을 구상한다고 말했다. 서양의 픽처레스크 정원 미학부터 동양적 산수풍경까지, 자연을 재현하는 여러 양식이 조각으로 혼합되었다. 작업을 보며 무언가 오래된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깃든 듯한 낡은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은 닳고 낡는다. 정원과 같이 가꾸어진 자연 역시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홍자영은 바로 그 낡음에 시선을 기울인 듯했다. 매끄럽지만은 않은 형상이었다.

홍자영의 조각은 종종 나무로 제작된 가림막을 동반한다. 그것은 조각 곁에 놓여 있고, 구멍이 뚫려 있다. 관객은 몸을 구부린 채 구멍을 거쳐 조각을 볼 수 있다. 가림막을 통하면 조각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그만큼 시야가 좁아진다. 쾌적한 관람 경험은 아닐지언정, 전시된 조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홍자영은 무언가를 깊이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감각을 통해, 사물의 표면 너머에 내재한 모종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보는 것은 대상에 새로운 면모를 불어 넣는다. 설령 대상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몸을 구부려 조각을 바라보며, 매끄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매끄러움이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어쩌면 매끄러움 안에도 상처가 있을지 모른다. 오랫동안 사용한 스마트폰에 스크래치가 생기는 것처럼.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문득 그 상처가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홍자영의 작업은 무언가를 다르게, 또 깊이 보는 법을 가르쳐주고, 매끄러움 속에서 흠이 난 것을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홍자영의 조각을 따라 세계를 보기. 그것은 세계를 다르게, 또 깊이 보는 것이며, 실은 어디에나 숨겨져 있던 상처를 찾아내는 것이다. 가림막 너머에 놓인 조각은 꼭 다른 세상의 사물 같았다. 그것은 거대하거나 더럽거나 날카로운 것 없이도 상처와 균열을 엿볼 수 있는 사물처럼 보였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