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상실 이후 기리는 행위를 통해 기억하기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죽음과 상실 이후 기리는 행위를 통해 기억하기 무명인(無名人)들…문영민 작가의 ‘관계의 감각’

기사입력2025-03-12 08:22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지난 여름 한강변을 걷다, 우연히 절두산 성지에 발길이 닿았다. 어둠이 짙어질 무렵부터 광장을 걸었다. 어둑한 언덕 위 어스름하게 드러나는 바윗덩어리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놓인 곳을 향해 몇 계단을 올라가 보니 묵직해 보이는 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휴대전화 불빛을 비춰보니 부조로 새겨진 여러 인물상이 보였다. 상투를 튼 사람, 모자를 쓴 사람, 여자, 남자…. 형상은 거의 균일한 크기로 깎여 있었지만, 그들의 손 모양, 눈썹, 미소의 모양은 미묘하게 달랐으며, 머리 위에는 광배(光背)를 연상시키는 둥근 면이 깎여 있었다.

조각은 순교한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였고, 돌 위에 그들의 이름이 음각되었다. 탑 뒤편에는 또 다른 이름들이 각인되었는데 개중 이름 모를 사람을 뜻하는 무명인(無名人)이라는 단어도 눈에 띄었다. 이들의 이름 위에 내린 어둠 사이로 눅눅한 바람이 불었다. 먼 곳에 새겨진 이름을 읽어내린 이후 성지로 내려와 작은 초에 불을 붙이며 봉헌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았으므로.

문영민, ‘관계의 감각 20170406’, 2017, 리넨에 유채, 32×41cm. 이미지 작가 제공.

몇 년 전 우연히 한 작가의 작업을 보았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어진 남자의 뒷모습을 담은 그림이었다. 화면 속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어깨는 내려앉았다. 손은 무릎을 스쳐 바닥에 닿으려고 한다. 어두운색 양복 재킷 이음매가 팽팽하게 당겨져 옷감이 빳빳해진 채로. 두 다리는 꿇어앉아 바닥에 붙어있고, 양말을 신은 두 발은 바닥을 지지한다. 그의 몸이 놓인 바닥(혹은 배경)에는 미묘한 녹색 기운이 감도는 회색 물감이 뻣뻣한 붓을 통해 유영하듯 발렸다. 그림자 또한 이 회색 면에 스미며 드리운다. 화면에는 남자의 몸 외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 게다가 동일한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모를 사람이 다음 캔버스에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캔버스에도. 연속되어 보이는 몸은 한 사람의 몸짓을 넘어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절하는 남성을 그린 이유가 궁금했고, 작업과 함께 놓인 작가의 글을 읽으며 이 그림들이 이 내가 보았던 가장 ‘정확한’ 작업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본 그림은 문영민 작가의 ‘관계의 감각’(2015~2017)이다. 무릎을 꿇고 엎어진 남성의 모습을 가로 32cm 세로 41cm 크기의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그린 연작 회화다. 화면에 그려진 대상은 매번 거의 같다.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바닥, 무릎을 꿇은 오직 한 사람. 어떤 화면에서는 기도하듯, 어떤 장면에서는 절을 하는 듯 보이는. 절은 작가가 유년시절부터 매혹적이지만 불가해하게 느껴 온 행위이자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동시에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보편적으로 유교 문화권에서 죽은 사람을 기리는 제사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떠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친숙하고도 익숙한 방식이다.

허나, 인사받는 이에게도 그 마음과 몸짓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없기에 불가능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행위와 마치 닿을 수 없는 이에게 인사를 건네듯 한때 이미 ‘죽었다’라고 이야기되는 회화를 생산하는 작가의 수행이 촘촘히 엮인다. 먼 곳으로 사라진 존재를 애도하는 순간, 혹은 이유도 모른 채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 열리는 자리. 바로 그것이 ‘관계의 감각’이 내게 열어젖힌 회화적 감각이다.

문영민, ‘관계의 감각 자화상I’, 2021, 리넨에 유채, 32×41cm. 이미지 작가 제공.

절은 죽은 이들에게 가닿고자 하는 행위이며, 회화는 이를 위한 형식이다. 또한 ‘반복해서 그린다’라는 수행을 통해 회화는 애도의 형식으로 전환된다. 절과 회화는 서로를 반영하고, 회화는 절의 수행성을, 절은 회화의 특성을 품으며 애도의 불가능성과 필연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2017년 작업노트에서 문영민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의 영화 ‘체리 향기’(1997)의 주인공 바디가 타인에게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구덩이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에 주목한다고 언급했다. 죽음을 인지하는 동시에 지연시키는 행위. 그가 한 사람의 뒷모습을 반복해 재현하는 일 역시 ‘체리 향기’의 바디처럼 생이 다해버리는 순간이나 무엇인가가 종결되는 순간을 늦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반복은 끝맺음을 미루고 우리를 다양한 사유로 이끌며 죽음이라는 ‘끝’을 소거한다. 어쩌면 그는 회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것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에 관해 알기를 멈추지 않으려 한 게 아닐까.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내게 익명의 죽음,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채 사라진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애도하는 마음이 수행적 몸짓과 엮인다.

어떤 것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상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그것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허나, 죽음과 상실 이후 그것을 생각하고 기리는 행위를 통해 기억하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 모순 속에서 예술이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말처럼, 내가 전하는 절이 과연 먼 곳의 조상이나 부재한 존재에게 가닿을 수 있을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기에 사라진 존재를 위해 마음을 담는 행위는 내게 늘 불가사의하면서도 흥미롭다. 마치 죽거나 떠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절두산 성지에서 본 이름 모를 사람을 기리는 것처럼,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작은 의식을 수행하는 것처럼.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싶다.

작가와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려진 인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그림을 보고 상처받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상처는, 누군가가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작업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 순간을 목격하면서 새겨진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절은 반복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