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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예술을 읽다

정지되거나 멈춰 있는 것에 생동감을 주는 일

살아있는 책…리빙 아카이브(Living Archive) 

기사입력2024-01-10 09:48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다른기사보기

아카이브는 그리스어 아르케(archē)’에 기원을 둔다. 아르케는 시작’, ‘원천’, ‘지배적인 원리등을 의미했으나 현대에는 기록물, 정보, 데이터 등을 체계적으로 수집, 보존, 관리하는 장소나 체계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기록된 것, 남겨져 모이게 된 것. 아주 보편적인 차원에서 아카이브는 주로 죽은 것의 모음이다. 죽거나 멈춰야지만 남겨지는 것이 될 수 있고, 이 죽은 것들을 통해 우리는 기억하거나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아카이브는 죽은 것들의 모음이기 때문에 언제나 정지된 것일까? 현재 진행형인 것들은 모음에 포함될 수 없어 보인다.

 

최근 나는 노르웨이와 벨기에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안무가 메테 에드바센(Mette Edvardsen)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를 보고 왔다. 이 작품은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 페스티벌인 옵/신 페스티벌(OB/SCENE Festival, 2023.10.31~11.16)에서 선보인 작품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공연예술에서 퍼포머는 무용수이거나 배우다. 안무와 대본 그리고 악보를 기반으로 몸을 선보인다. 몸을 움직이거나,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혹은 노래를 부른다. 생생함을 재현한다. 그러나, /신 페스티벌에서 소개하는 퍼포먼스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공연예술의 특성을 넘어선다. 페스티벌에서 공개된 작품 설명을 읽고 호기심이 들었다.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에서 퍼포머는 살아있는 책이 되어 도서관에 소장된다. 도서관을 방문한 이들이 읽고 싶은 책을 고르면, 그 책은 독자를 도서관의 어느 장소로 데려가거나 바깥에서 산책을 하면서 자신의 내용을 암송한다. 책 한 권을 외우는 행위는 끊임없는 기억과 망각의 과정이다. 정보와 지식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흩어지는 오늘날 가장 비효율적일 수 있는 이 활동은 몸에 기억을 각인시켜 온, 몸에서 몸으로 을 전해온 과거의 감각을 소환한다. 그 더디고 비생산적인 움직임은 시간의 속도감을 잠시나마 늦추고 유토피아적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 퍼포먼스의 기록 이미지, <사진=노진, 출처=옵/신 페스티벌>

 

관객은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이 아닌 도서관에 간다. 공연은 극장이라는 진공상태의 공간으로부터 일상적인 공간으로 무대를 옮겼다. 관객이 도서관에서 만나거나 보게 되는 것은 멈춘 사물인 책도, 배우나 연주자, 무용수도 아닌 책의 일부가 되어버린 한 사람이다. 퍼포머는 공연을 위해 긴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외우는 시간을 보내며 방문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책을 들려줄 예정이라고 했다. 책을 외우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한 권의 책을 쓰기까지 걸렸던 시간의 자리에 다시 누워보는 퍼포머의 시간을 생각했다.

 

공연을 보러 갔던 날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 공연장소인 더북소사이어티는 사직동에 있는 작은 예술서점이다. 바닥과 벽면이 샛노란 이곳에 책을 살펴보는 몇 사람과 서점 지기, 공연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멈춘 것들이 벽면과 평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공연을 기다리며 이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책들을 살펴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시간이 이 공간에 담겨있을까 생각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는 퍼포머에게 이끌려 서점 뒤 뜰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살아있는 책인 퍼포머는 자신이 김혜순의 여자짐승아시아하기가 되었다고 말해줬다.

 

살아있는 책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서점 앞을 지나는 행인이 있었고, 그를 보는 나와 목소리를 통해 상상하게 된 눈이 흩날리는 외딴곳이 겹쳐졌다. 나는 잠시 내가 어디 앉아있는지 잊었다. 마른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고, 책 속에서는 눈의 여자라고 묘사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약 30분간 책을 듣고 나왔다. 서점을 나서며 이 작품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다.

 

실로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책을 외우는 일은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퍼포머는 낭독하는 중에 단어를 정정하기도 했고, 침묵하거나 목소리를 떨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책의 어느 부분을 생략해 읽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허나, 실패하거나 머뭇거림에도 불구하고 퍼포머는 계속해서 책이 되기를 멈추지 않았고, 책은 내가 참여한 회차가 아닌 다른 회차에서도 새롭게 읽혔을 것이다.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에서 소개된 책은 일종의 정지된 시간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책, 리빙 아카이브는 단지 멈춘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지난한 시간을 포용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정지되거나 멈춰 있는 것에 생동감을 주는 일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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