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색, 변모하는 색, 새롭게 등장한 색을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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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잊힌 색, 변모하는 색, 새롭게 등장한 색을 탐구 평등한 빨강과 사냥꾼…조유정의 ‘Red Cabinet’

기사입력2025-05-18 10:0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서점을 돌아다니다가 외서 코너에서 흥미로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표지 면의 윗부분에는 동백 빛깔 바탕색이 깔려 있고, 내부의 형광 분홍 바탕 위에 자홍과 연노랑 꽃이 그려져 있다. 아랫부분 바탕은 자두색과 상아색이 번갈아 나오는 체커보드 패턴으로 덮여 있고 쑥과 들판 사이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둥근 색 면이 깔려 있다. 중앙에는 빨간색 눈을 가진 흰토끼가 그려져 있다. 책은 일본의 시각디자인 제작물에서 활용한 여러 가지 색의 조합을 분류해 둔 모음집이었다. 정성스럽게 디자인된 것 같은 책. 눈길을 끄는 외양에 꽤 값이 나갔다. 두 주 정도 구매를 고민하다가 한 권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책을 소유하면 책 속의 색을 내가 가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고 그 가치에 비하면 책값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색은 도처에 널려있다. 책으로 정리되거나 기록된 것을 사지 않아도 향유하거나 볼 수 있다. 예컨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자연으로부터 발견되는 색이 있을 것이다. 또, 우리 신체가 지닌 고유의 색처럼 태어나며 지니게 된 고유한 빛깔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사회나 산업이 선택한 색이 있을 것이다. 인공적으로 조합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색. 세계에 색은 당연하게 존재하는 듯 보인다. 또한, 개별의 색을 재현하기 위해 추출된 안료의 기원으로부터 출발해 그것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려본다면 색은 보고 감각하는 것 이상이 된다. 그렇다면 물감으로 평면에 세계를 표현하거나, 재현하거나, 구축해 온 회화작품에 담긴 색은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을까?

조유정, ‘Red Cabinet’, 2024, 종이에 수채, 152×150cm, 이미지 작가 제공, 사진 스튜디오 오실로스코프 촬영.

색을 공평하게 드러내는 듯한 그림이 있다. 얼마 전 조유정의 개인전 ‘Color & Grid’에 방문해 커다란 그림 한 점을 보았다. 작품제목은 ‘Red Cabinet(붉은 수납장)’(2024)으로, 종이에 붉은 계열 수채 물감만을 사용해 그린 그림이었다. 화면에는 나무로 만든 캐비닛이 보이고 안쪽에 그려진 서랍은 원근이 적용됐다. 서랍 천장에는 다양한 빨강을 그리드에 따라 채운 컬러 차트가 붙어 있고, 내부에는 물감 안료가 유래한 원재료가 배열되어 있다. 아래쪽 공간에는 붉은 깃털을 뽐내는 여러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는데, 배경에는 벽지와도 같은 무늬가 채워져 있다. 위쪽 서랍장은 장미휘석, 코치닐, 홍화와 같이 천연 안료에서 유래한 물감으로, 아래쪽 서랍 부는 인공 안료로 제작한 물감으로만 채색되었다. 또한 화면에 등장하는 물체를 그것과 동일한 안료로 채색함으로써, “색의 물질적 기원과 유래”를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했다(조유정 작업노트, 2025 참조).

캐비닛 문에는 붉은색 물감이 발린 팔레트가 걸려 있는데, 이 역시 그림에 실제로 사용한 물감 덩어리를 그리고 해당하는 색으로 칠해졌다. 하단에 걸린 한 장의 그림 속에는 곤충과 선인장이 그려져 있는데, 붉은색 계열 안료인 코치닐 안료의 주재료인 연지벌레의 암컷과 수컷으로부터 추출한 색을 해당하는 면에 칠한 것이다.

이 독특한 그림을 멀리서 보았을 때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화면이 가득 차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붉은 계열의 물감과 그것의 기원이나 원료를 재현한 대상이 빼곡하게 담긴 한편, 이 그림의 독특한 점은 표면이 아주 평평하다는 점이다. 마치 그려진 것들과 발라낸 것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다루고자 한다는 듯이. 공정하게 배열된 색은 어느 하나도 우위에 서지 않으며 색이 가진 배경과 맥락을 평등한 층위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그려진 대상은 모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고 생기를 띈다. ‘Red Cabinet’은 말 그대로 다종다기한 빨강을 보관한 수납장이자 색이 지닌 역사와 가치의 위계를 재배열해 색들을 동등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한다.

그의 작업과정은 단순히 물감을 소진하거나 나열하기 위한 일이 아닌 일종의 저항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그릴 때 12색, 24색, 36색 체계에 의문을 가지며, 그 체계의 속하지 않은 색들이 궁금했다는 작가는 자신이 진행한 다양한 연구와 작업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들이 아는 한 ‘최선의 선택’을 하기 바란다고 썼다. 그는 자신을 ‘색 사냥꾼(Color Hunter)’이라 부른다. 잊힌 색, 변모하는 색, 새롭게 등장한 색을 탐구하고 그림으로 남기는 기록자의 역할을 자임하며 그가 직접 덧붙인 표현이다(조유정 작업 노트, 2025). 실제로 그는 다양한 종류의 물감을 수집하는데, 작업실 한쪽 벽면에는 물감을 색과 안료 번호순서에 따라 배열해 둔 분류 공간이 있다. 안료의 원료를 구해 직접 물감을 조색하기도 하고, 염료를 만들어내는 실험을 이어 오기도 한다. 옥상에서는 장미를 기르고 꽃잎으로 안료와 잉크로 조제한다. 삶과 연구가 얽히며, 단순히 물감을 사거나 소진하는 일이 아닌 색을 탐구하고 보여주기 위한 여러 일들을 동반한다. 집요함이 작가의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해 본다면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갖추었다.